잠시 후 다시 꿈을 꾸었다. 아까 그 꿈이 이어진 것 같았지만 시간도 아까와 달랐고 꿈도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천막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가운데서 한 노인이 서서 큰 소리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 좋은 일이 좋게 끝나도록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의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이 그 노인을 끌어내었다. 노인을 밖으로 쫓아낸 후 다른 노인이 다시 무슨 말인가를 크게 외쳤고 다른 사람들도 호응을 했다. 아마 두 의견 중 이번 노인의 의견이 사람들의 구미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사람들이 우르르르 몰려 나갔다. 나 역시 사람들 틈에 섞여서 영문도 모르고 밖으로 나왔는데, 모르는 얼굴들과 아는 얼굴들이 섞여 있었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여기는 이 상태로 죽을 때까지 함께 돌아다니는 마을이라 모르는 얼굴이 있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서 옛날에 올라가고 나서 종종 오르는 그 바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기로 했다. 그 바위는 산이 그림의 양쪽을 가로지른다고 할 때, 오른쪽 중간쯤에 위치해 있어서 우리 마을이 그즈음을 지나갈 때에만 올라갈 수 있는 셈인데 벌서 천막이 한 바퀴를 돌고 그 위치에 오게 된 것이었다. 아이가 죽고 나서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는 뜻인 것 같았다.
바위에 올라가서 보니 아까 그 노인이 손을 휘저으면서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노인이 바라보는 쪽을 보니 어마어마한 인원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합쳐도 그 숫자의 30%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전쟁이라기에는 걸어오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너무 평온했고 손에도 아무것도 들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왼쪽 끝을 보니 그 무리들의 일부는 이미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본 낯선 얼굴들이 바로 그들인가 보았다. 걸어오는 사람들은 마을의 왼쪽으로부터 해서 점점 많아지고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 그 인원이 모두 마을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사람들이 이윽고 마을을 둘러쌌다. 들어갈 사람들은 모두 들어가고 못 들어간 사람들이 마을 밖에 도착한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낯익은 사람 몇이 그 안으로 들어가 뭐라고 손을 휘저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한 시간 정도 되는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외부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더 오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자 마치 마을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데에는 또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었지만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가서 그냥 내 천막으로 들어와 버렸다.
"어멋!"
어떤 여자가 옷을 모두 벗고 천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다. 나는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뭘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짜증이 나서 물었다.
"남의 천막에서 뭐 하는 거요?"
사실, 얼굴을 안다는 것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지 내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꿈속의 내가 아는 사람인 건 사실이었는지 여자는 급히 가슴과 그곳을 가리면서 말했다.
"아니, 아저씨 천막은 저 뒤로 옮겼잖아요. 아들 천막 쓸 거라고 필요 없다고, 앞에 있는 부엌만 쓰게 해달라고 하고서 이게 몇 번째예요? 아저씨 때문에 남자도 못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어서 나가주세요."
이제 기억이 나려는 것 같다. 혼란스럽다. 미안하다는 말이 기억이 나지 않아 손을 휘저어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고 나왔다. 아들의 천막이었지만 지금은 내 천막이라는 곳에 들어와 벌렁 드러누웠다. 아들의 활과 내 활이 함께 놓여 있다. 아들의 활은 사용을 하지 않았는지 줄을 풀어놓았다. 아니, 줄을 갈던 중이었나?
이 혼란은 무엇이고, 아들이 죽고 몇 년이나 지난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천막 입구가 열렸다. 아, 하샤. 그 여자의 이름은 하샤였다. 하샤가 머리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출발한다는데 같이 가실래요?"
"어디로?"
"사냥이요. 지금 온 사람들에게 사냥을 가르치기로 했잖아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 아까 큰 천막에서 있었던 일이 무슨 뜻인지 알아?"
"우리가 이렇게 숫자가 많으면 동물들이 줄어들 수 있다고 일부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얘기한 할아버지 얘기요? 아니면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는 없다고 같이 사냥하고 같이 먹고살자고 한 할아버지 얘기요?"
"첫 번째가 끌리네."
"산을 넘어가자고 했어요. 대지의 피가 붉은색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 할아버지가 아까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던 것 같던데..."
"맞아요. 산을 넘어가는 인원을 우리 마을과 새로 오는 사람들에서 똑같이 뽑자고 했었는데 거부당했으니까 그냥 이곳에 텐트를 치자고 한 거죠."
"그 사람들은 텐트를 치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그 사람들은 강 남쪽에서 살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곳에 불이 떨어졌대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땅속에서 천둥이 쳤다고 했어요."
"아, 지진이 났구나."
"지진이 뭔가요?"
"아니야, 미안해. 그래서 지금 사냥을 간다는 건가?"
"네, 남쪽하고 이곳 하고 동물들 습성이 달라서 넘어오고 나서 한 번도 사냥에 성공한 적이 없다나 봐요. 우리가 보여주고 나면 이제 저 쪽으로 마을을 새로 세우고 나서 자기들끼리 사냥을 하겠지요."
그렇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여기 와서 내 의지대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게 해 놓고 지켜보고, 나 역시 되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있다.
"나는 사냥은 가지 않을게. 대신 하샤의 고기를 좀 가져가야겠어."
"사냥을 가지 않고 고기는 들고 가겠다는 말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거예요? 어딜 가시는데요?"
"산 넘어가려고."
"혼자서요?"
"혼자 가야지. 아까도 사람들이 반대했잖아."
"막을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아저씨라면 사람들에게 아저씨가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거예요. 사냥하는 양이 많아서 조금 아쉽기는 하겠지만."
"혹시 그 노인 말대로 산을 넘어가서도 사냥할 게 많으면 여기 와서 알려줄게."
"알겠어요. 그럼 전 사냥 따라가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그래. 최대한 빨리 다시 볼 수 있었으면 ㅈ호겠다."
"제 몸이요? 생각나죠?"
"아니야, 마을 사람들 다시 보면 좋겠다고 얘기한 거야."
하샤가 뾰룡통하게 장난기 많은 표정을 보이며 나갔다. 나는 손이 알아서 아이의 활을 다시 묶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 활과 함께 화살을 챙겨서 허리에 차고 샌들 줄을 종아리까지 묶은 후 칼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천막 밖으로 나와서 마을 뒤쪽, 산을 향했다. 몇 명이 나를 보고 뭐라고 말을 했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산에 오르는 길은 힘들었지만, 아이가 뛰어내린 바위까지가 그나마 평탄한 편이었다. 그 후부터는 바위들이 뾰족뾰족해서 발 디딜 곳을 찾아내는 것부터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조금 오르고 나니 눈에 띄게 추워졌다. 고기를 메고 있어서 더 힘이 들어서 땀이 난 것 같았다. 춥지 않은 건 좋은데 다리가 아픈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숨이 차올랐다. 아직도 위를 올려다보면 계속 산꼭대기가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추워졌다. 땀이 흐르는데도 몸 여기저기서 추위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코가 차가운 느낌이 생소했다. 몸 밖의 나는 익숙한 느낌이지만 몸은 생소해서 계속 재채기를 해 댔다.
해가 질 때가 되자 이제 시냇물이 보였다.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림자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마을애서 천막이 이동할 때마다 매번 올라와 보았다면 시냇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물을 뜨러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있었을 텐데 싶었다. 그런데 이제 마을을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 외지인들이 천막이 고정해 놓고 뒤에 산을 올라가 보면 바로 물을 찾게 되겠지.
불을 피울까 했지만 그렇게 추울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불씨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자기에는 너무 추웠다. 밤새도록 올라갈까 했지만 얼마나 올라온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밤새 올라가고 낮에 더울 때 그늘에서 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냇물을 두 모금 마시고 고기를 조금 뜯었다. 작은 조각으로 찢은 다음 칼 옆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한 조각씩 꺼내어 오물거리며 다시 올라갔다. 한참 걸어가자 마을이 끝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마을이라기보다 마을의 불빛이었다. 천막 안의 불은 조금 더 은은했고 천막 밖의 불은 뾰족한 빨간색이었다. 잠시 돌아보고 있다가 멍해지는 순간, 졸리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몸을 돌려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찢어 놓은 고기도 모두 씹어서 삼켰고 말 그대로 습관적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하루 안에 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면 중간에 천막을 칠 곳이라도 봐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다시 와야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와야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다시 오고 싶을 수도 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오르막이 없어지고 내리막이 되었다. 안 그래도 졸음에 멍하고 추위에 정신이 없는데 내내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르다가 오르막길이 없어지니 당황스러웠다. 조금 내리막으로 서른 걸음 정도 거리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고 그 뒤로 더 큰 봉우리는 없는 것 같았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왔다. 따뜻해지는 건 느낄 수 없었다. 고기도 잠시 앉아서 찢은 것까지도 다 먹었다. 이제 싸 온 고기를 절 반을 다 먹은 셈이었다. 더 먹고 나면 내려가다가 기운이 없어질 수도 있다. 마지막 봉우리는 경사가 심했다. 뭔가로 일부러 바위를 깎은 듯한 모양으로 조금만 잘못하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았다. 요령껏 매달려서 옆으로 기다시피 올라가서 뾰족한 봉오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무가 있었다. 이쪽에서 올라가면서 바위만 잔뜩 있었는데 산 너머에는 나무가 가득했다. 어쩔 수 없이 봉오리 위로 발을 딛고 불안정한 자세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나무들 너머로 산 아래가 보였다. 나뭇잎 종류가 다른 나무들이 산 밑에는 더 많아 보였다. 그리고 숲이 끝나는 곳에 남쪽과 비슷한 강이 하나 흘렀다. 그리고 바다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큰 강이 바다로 합쳐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 우리 강도 바다로 가는 거 아니야?"
하면서 우리 마을 쪽을 보았다. 산이 강 쪽으로 이어지고 강은 그 산 사이로 지나갔다. 그래서 우리가 그쪽으로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 뒤로 바다가 있을 것이다. 바다로 가기 위해 이 높은 산을 오를 필요는 없다. 강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마을에서도 충분히 덜 두려워할 것이다. 땅이 넓어지면 동물들도 많아지고, 그러면 살기에 더 좋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을로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발이 미끄러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가 뒤통수를 딱, 때린 것처럼 잠에서 깨었다.
아직 기차가 달리고 있다. 그런데 기차 안의 분위기가 왠지 술렁거린다. 뒤를 돌아보자 아저씨가 짐을 들고 서 있다.
'짐은 따로 안 가져온 것 같던데, 발 있는 데 있는 가방이 다지?"
나는 멍해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 왔어. 이제 내리면 돼. 준비해. 너무 잘 자는 것 같아서 언제 깨워야 했는데 알아서 잘 일어났네."
"감사합니다."
한 번에 미련을 가진 꿈을 두 번이나 꾸다니,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기차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오려고 딩동댕 하는 소리가 나는 순간 그 소리가 내 알람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곧 잠에서 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