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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3. 2024

버려진 문장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 문장이 모이면 뭔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즐거움과 간절함 사이에서, 혹은 그 둘 다를 모두 즐기면서 글을 쓰는 법을 배운 것은 확실히 최근의 일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을 통해 뭔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불만적인 생각 자체도 최근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흐릿하게 형체를 가지게 된 후 십여 년에 걸쳐서 점차 구체화된 것이 지금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인생을 역사와 같은 하나의 시간의 흐름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 재미를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글을 쓰려는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재의 나라면, 단순히 단어를 조합하고 문장을 만들다가 문장들이 모이면 뭔가가 된다는 에 대 신기하게 느끼는 것은 원시시대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글이 만들어진다는 것감각적으로는 알지만 나는 그저 흉내만 낼뿐, 언젠가 내가 생각하던 그런 글을 정말로 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희망을 가질 뿐이지만 그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내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일종의 중간평가 결과 같은 것인데 아예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은 나올 수가 없다. 애초에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책을 원 없이 읽으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비해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몇 년 전까지는 전혀 해 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글과 그 의미 사이의 이중적인 관계, 겉으로는 글자의 나열이지만 그것을 언어로써 해석을 하면 글자의 모양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의미가 나온다는 것, 하지만 한편으로 지극히 간단한 의미 표현하기 위해 대단히 장황한 글이 나올 수도 있고 난해한 의미를 가지고 있더라도 글로는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매력이 있어서 종이와 펜이 주어지고 글을 쓸 수 있다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특히 회사에서 매일 일지 형식의 글을 서술형으로 적어본 적이 있었는데,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드시 필요해서 뭔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언필요할지 몰라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미리 뒤적거리는 내 성격에는 너무나 잘 맞는 기록이었다. 일을 파악하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보통 그런 사람들은 메모는 무조건 간단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신념처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뭐라 말을 해 줄 수없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혹은 거래처에서 수첩이 오면 무조건 뭔가를 쓰고 보았다. 서술형으로 적는 건 나중에는 한글파일로 써서 프린트한 후 오려서 수첩에 붙여 놓곤 했다. 당연히 속도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글을 생각의 속도에 맞추어서 써야 하는 사람이어서 키보드를 사용한다고 글을 쓰는 속도가 그렇게 빨라지지 않는다. 키보드를 사용해야 하는 것은 단지 손으로 글씨를 쓰면 손이 아프기 때문이다. 손이 아픈 건 그 자체로는 상관없다. 문제는 손이 아프면 그만 쓰게 된다는 것이다. 더 쓰고 싶지 않아서 줄여서 쓰기도 하고, 손이 아파서 쉬면서 쓰다가 생각이 늘어지면 그 글은 거기서 끝인 것이다.
그래도 수첩에 대한 욕심은 대단해서, 특히 소형 수첩, 손바닥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수첩은 주면 꼬박꼬박 받아놓고는 처음 몇 개는 끄적거리기라도 하지만 나중에는 쌓아 놓거나 달력이 들어 으면 오래 놔둬도 소용이 없으니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다.
지난주에는 서랍을 정리하다가 작년에 받은 수첩을 찾았다. 나는 받아서 비닐만 뜯고 방치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펴 보니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내가 글씨를 쓸 리가 없는데 무슨 내용일까 하고 읽어 보았는데, 내가 쓴 기억은 없지만 내용은 틀림없이 내가 썼을 법한 내용이라는 것이 너무 웃겼다. 쓴 적 없지만 내용상 내가 쓴 게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기록. 그 글만 없었으면 그래도 새 수첩인데 그 몇 줄 때문에 중고가 되었다. 어차피 2023년도 달력이 인쇄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기는 하지만.
내가 쓴 몇 줄의 글 전문은 다음과 같다.
"새 수첩을 쓰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이미 종이에 줄을 인쇄한 것부터가 사람의 손길이기는 하지만, 손으로 쓴 흔적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펜의 재질, 글씨체 등에도 더욱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감각을 즐기며 글을 써 놓고 그게 전부였다. 마치 300만 원짜리 정을 사가지고 가서 하는 게 절벽에 'ㅇㅇ 왔다감' 새기는 것, 그나마도 한 번 새기고서 '나는 등산 체질이 아니야'라면서 더 이상 정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는 그런 느낌이 아닌가?
내 기억에 이건 처음이 아니다. 2013년인가 2014년인가에도 한 번 저렇게 하고 버린 수첩이 있어서 그런 말은 따로 일기에나 적고 수첩에는 적지 않기로 했었다. 그 당시에는 수첩에 그림도 그리고 매뉴얼도 옮겨 적고 하면서 활용도가 매우 높은 편이었는데 그 해에는 저런 종류의 문장 몇 줄만 적고 일 년 내내 방치해 두었었기 때문이다. 이미 필요한 건 그전 해의 수첩에 모두 모여 있었으므로.
한편으로는 회의 때 회의 내용 메모를 휴대폰으로 해도 용납되는 분위기가 되면서 회사 수첩의 활용도가 매우 떨어진 건가 싶기도 하다. 어차피 회의 내용을 공유해야 하면 휴대폰으로 메모를 하고 편집해서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것이 훨씬 빠를 테니까. 하지만 그럴 일이 없는 나는 아직도 회의에서는 손으로 메모를 한다. 그런데도 저런 거 몇 줄로 생명이 끝나이듬해 6월까지 방치된 수첩이 있다는 게 충격이긴 하다. 불쌍한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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