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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28. 2024

필요 없는 말

잡지나 블로그 글을 읽다 가끔 마주치는 구절이 있다.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한동안 듣기 힘든 말도 아닌. "기고 요청을 받았지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알지 못했다.", "ㅇㅇ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사실은 이런 문장을 보면 대학생 시절까지는 단순히 솔직한 글이라고 생각을 했다. 인간적인 고민도 느껴지고 상당히 작가와의 거리도 좁혀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금은 책을 미리 서점에서 어보고 나서 구입하는 편인데 한두 군데 정도야 저런 말이 나오면 별생각 없이 장난처럼 넘길 수 있지만, 블로그 글을 읽거나 책을 읽다가 저런 부분이 자꾸 눈에 띄면 어쩔 수 없이 그만 읽게 된다.
딱히 누구를 지칭하는 건 아니다. 지금은 블로그 글도 별로 읽지 않으니까.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모바일 기기로 인터넷 접속하는 것이 매우 보편화된 시기부터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블로그 역시 SNS 같은 측면이 있어서 모두가 컴퓨터만 사용해서 인터넷에 접속해야 했을 때보다는 핸드폰으로도 접속이 편리하고 작성도 쉬운 지금이 더 들어가 보기 쉬운 것 같다. 기술이 위지위그 같은 것을 사용하면서도 보안에 신경 쓸 수 있을 만한 수준이 되었을 때쯤 모바일로 축이 이동한, 시점의 문제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끔 서점에서 사 오는 문학잡지나 문장이 긴 W 같은 것 말고는 대화나 글을 쓴 이유에 대한 글이 들어가 있을 만한 책은 읽지 않게 되었다.
"기고 요청을 받았지만..."이라는 말은 글을 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글이 어떻게 진행이 되고 어떻게 아이디어가 자라나고 어떻게 끝났는지 완성도의 실제와 관계없이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로 솔직히 말하면 예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농담인지 가십인지는 몰라도 독자에게 직접 털어놓는다? 내 생각에는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쓸 말이 없으면 글을 내놓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글의 내용에 자신이 없으면 글을 혼자만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문장만이라도 정말 쓰지 말았어야 할 무책임한 이다.
"ㅇㅇ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은 글을 쓰기 어려웠다,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써 내려간 글을 남들 읽으라고 내놓는 일이 당연한가? 고민은 당연히 글을 쓰려면 하게 되는 게 아닌가? 그 문장의 의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본인이 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라면 애초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글이었을 것이고, 맞춤형 글을 쓰기 위해 고민을 했다고 하면 마지막에 써도 무난할 일이다. 왜 시작부터 독자가 '이 글은 고민을 많이 해서 쓴 글이구나'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말을 써 놓지 않으면 다들 '어련히 저절로 나온 글이겠지'라고 생각할 줄 안 것일까? 본인은 남의 글을 읽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글을 읽을 때에는 나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조선시대에 경서를 읽을 때처럼 '마음을 맑게 하고 생각을 고르며 또렷하게 하고 정좌하고 앉아서...'처럼 한다면 최상의 예의겠지만 우리가 책을 옛날 경서처럼 반복해서 읽어 가면서 이해도를 덧칠해 나가 점점 또렷하게 이해하려는 것도 아니고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도 지겹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책을 쓴 사람이 갖은 애를 써서 머릿속에 있는 것을 문장으로 풀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가정을 할 필요는 있다. 최선을 다해 쓴 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아무리 누워서 읽더라도 뭔가는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정을 하고 보면 쓰레기 같은 책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힘들게 썼을 리가 없는 책들은 있게 마련이다. 그냥 누구나 듣기 좋을 말만 모아둔 것 같은 글, 일부러 남들을 도발하려고, 혼자 기분 좋으려고 쓴 것 같은 글들이 쉽게 구분이 간다. 예의가 없는 글들은 내가 예의를 차리고 나서야 구분이 되는 법이다. 내가 성의 없이 읽으려 하면 성의 없이 쓴 글도 구분할 수 없다. 남을 보고 인사를 먼저 해 보아야 상대방이 예의가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글을 쓰지만 아직은 내 글도 예의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머리를 짜내는 것도 맞고 최대한 어르고 달래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문장으로 내려보내려 하는 것도 맞다. 힘들게 쓰는 것도 맞고, 글을 다 쓰고 나면 소파에 푹 기대어 이삼십 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자세는 아직까지 고려 대상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내 문장 자체에만 해도 아등바등하기 바쁘다는 뜻이다. 작품은 감상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아직까지 그런 글이 아닌, 단순히 내 마음에 드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글을 쓰고 있으니 좋게 보려고 해도 어쨌든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데 작가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나 또한 내 글에 대한 호불호를 가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바로잡아 먼저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쓰게 된 후에, 다른 사람이 내 글을 보았을 때 깎아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찾아내고 그 부분을 제거한 글을 쓰게 되면 그때 가서야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읽을 수 없고 읽기 힘든 글은 작품이 아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결국 그 이면에 읽기 힘든 것을 해석해 낸 기쁨에 상응하는 충분한 의미가 없으면, 그런 글은 한 세기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읽기 쉽지만 현재 상태를 묘사한 신문기사 같은 가치밖에 없다면 이십 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이삼 년만 지나도 바뀌기 십상인 내 생각을, 그 한 겹 아래의 굵은 힘줄처럼 변하지 않는 부분을 파헤치지 못하고 겉 부분만 써 내려가는 그런 글은 일 년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 모든 고개를 넘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서 마침내 남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글을 쓸 때가 오게 될지는 모르겠다. 계속해서 내 글만 다듬어도 시간이 부족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편지가 오가듯이 내 글을 다시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면 그 글을 쓰기 위해 고민을 했다는 생색내는 말은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글을 고민을 해서 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한참 망설였다는 말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자만 읽는 글을 쓰는 데도 이미 모든 문장을 망설이며 쓴다. 쉽게 쓰여지는 글 부러울 때가 있지만 그런 글은 예의를 차리고 읽는 사람들에게는 걸러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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