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웠다. 생각보다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은 같은 선상에 놓을 일이 아니다. 글이 잘 써진다고 해서 책을 폈을 때 술술 읽히는 것도 아니고 책이 잘 읽히는 날이라고 해서 글이 잘 써지는 것도 아니었다. 글자라는 암호를 매개로 한 의미의 주고받음은 대화처럼 같은 선상에서 주느냐 받느냐의 차이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내가 틀렸다. 글을 쓰는 건 긴 말을 하는 것과 같고 책을 읽는 것은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다. 단 모든 것에 조금 더 내 의지가 더 필요한 것뿐이다.
너무나 피곤한 날은 단지 휴식이 필요할 뿐이기에 글도 써지지 않고 책도 읽을 수 없다. 당연해 보이는 일이고 이제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 맞지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몸이 힘들 때도 머릿속에서는 옛날 물레방아가 돌듯이 힘차면서 느리게 글로 옮길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머릿속이 증기터빈을 돌리듯이 왁자지껄하다고 해서 글이 잘 써지는 건 아니다. 계속해서 아이디어가 줄줄줄 나오는 게 글을 쓰기에는 훨씬 편하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건 다르다. 책을 읽는다는 건 글자라는 암호를 해석을 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다시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그 문장들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그 의미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끊어지지 않게 머릿속에서도 연결을 해야 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글을 쓰는 것이 생각을 짜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책이 던져주는 이야기를 읽는 게 더 편할 것 같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머릿속에서 불러주는 말을 받아쓰기하듯 쓰는 게 훨씬 쉬운 일이다.
반대로 책이 잘 읽히는 날은 곧 집중이 잘 되는 날이다. 집중이 잘 되는 날은 생각을 할 때도 제법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멍하게 있는 사이에 글로 쓸 수도 없을 속도로 결론이 나고 마침표, 그다음 생각으로 넘어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대신 책을 읽을 때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마치 영화를 보듯이 책이 머릿속에서 즉석에서 영상을 만들어낸다.
이 둘은 글자라는 매개가 있기에 같아 보이지만 똑같은 도구도 우리가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법이 다르듯이 우리 머리가 글자라는 것을 다루는 방법도 용도에 따라 다른가 보다. 글을 쓰는 것은 글자를 이용해 머릿속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글을 읽는 것은 외부의 자극으로 머릿속에 이미지를 만들고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오늘은 퇴근하고 맥주를 한 잔 할까 했지만 방바닥에 누워서 뒤통수가 장판에 닿는 순간 맥주 생각도 다 달아나 버렸다. 그만큼 피곤했던 것이다. 회사에서도 물론 피곤했지만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네시쯤 깨어나 뒤척거린 탓이 더 크다. 그래서 오늘은 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책이나 읽으려고 했다. 그래서 꺼내든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었다. 올해 초에만 두 번을 읽었던 책이다. 술술 읽히면서도 어느 정도는 내용을 알고 있으니 편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용이 반전이 너무 많아 어리둥절한 것도 아니었으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이 말 그대로 문장 여기저기에 과속방지턱을 설치해 놓은 것처럼 한 번씩 글자를 읽던 눈동자가 멈추곤 했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피곤해서 눈이 따가워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에 떠올렸던 아이디어가 있어서
'글도 안 읽히는데 그 아이디어로 깨작거려 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키보드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디어 처음부터 써 보기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단순하고 막연한, 실제로는 A4 한 페이지도 안 될 것 같던 단순한 이야기가 갑자기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시작한 지 몇 문장 되지도 않아
'결론까지 가기 전에 스토리가 틀어질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써 내려간 끝에 결국 그 스토리는 마무리했다. 글은 언제나 마무리해야 한다고 들었고, 나도 동의하고, 항상 노력하지만 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피로로 인해 책은 읽지 못하지만 글은 쓸 수 있었다.
글을 한 편 쓰고 나면 뿌듯함이 몰려온다. 그게 나에게는 글을 쓰는 목적이다. 일종의 보람이니까. 하지만 무슨 글이든 쓰기만 하면 뿌듯한 건 아니다. 다시 읽어 보니 이건 안 쓰느니 못하다 싶은 글도 가끔 나온다. '나 좋자고 쓰는 글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은 필요 없어'라고 생각하고 쓴 글인데도 공개하기 힘들다는 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신경 쓰일 정도로 형편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한다. 어떤 글이든 나중에 덧붙일 수 있는 건 없다. 조그마한 새를 조각하듯이 시작하면 끝내야 한다. 거창할 필요가 없으니 끝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글을 다 쓰고 나니 이제는 눈까지 따가워져서 책도 못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