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에 대한 오래된 생각

by 루펠 Rup L

서양 문명사에서 플라톤이라 하면 이데아론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로 세상을 구분한 것이 먼저 떠오른다. 이 세상 자체가 모조품이고 실재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사실 그 실재 자체를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실재의 존재를 내가 안다는, 숨겨져 있는 지혜를 발견했다, 깨달았다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일종의 경외감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이 때문에 '숨겨진'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종교를 불문하고 수없이 회자되어 오는 전통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사방으로 원정단을 보냈다는 말이 무색하게 세상 수억 명의 종교인들은, 대표적으로 유대 계열 종교와 불교 계열 종교들은, 물론 어느 정도 신앙심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죽는 순간을 향한 진리의 순례자들이다. 일생동안 보통 사람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인생의 뒷면을 적어도 죽는 순간만이라도 깨닫기 위해서, 혹은 내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을 위해서 그 순간만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는 성리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다. 물질적인 세상과 그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이것 역시 경험에 의지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눈 것이다. 물질이 운행하는 것이 모두 법칙 때문이라면 법칙이 물질보다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법칙은 단지 물질들 사이의 관계일 뿐인가. 현대의 물리학은 그 법칙 또한 물질 자체와 상호 치환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조금 오랫동안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인터넷에서 검색으로 한 번에 해소해 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힘으로 하는 고민의 힘을 믿기에 계속 고민만을 거듭했다. 요즘은 그림에도 관심이 생겨서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 배경을 알 때와 모를 때, 이를테면 작가의 인생이라거나 그린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 같은 것이 내가 바라보는 느낌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미리 선입견을 가지지 말라고 작품을 숫자로만 제목을 삼았다는 작가들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느낌 그 자체만 바란 것 같은데, 나는 대상이 없는 그림은 배척하는 편이다. 작품이라는 형체를 보면서 그 의미를, 그 가느다란 실을 간신히 잡고 그러부터 그 그림을 그린 순간의 작가 혹은 작가가 보여주고 싶던 것과 '공감'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서 키보드에 자갈을 마구 떨어뜨려서 무작위로 입력된 글자들을 <시>라고 내놓는 것도 방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차이라면, 그림은 그렇게 해도 자본의 논리로 의미를 뒤집어 씌울 수 있기는 하지만 단어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자음과 모음이 난무한 그런 것을 시라고는 아무도 우기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반대로 타자기에 돌멩이를 떨어뜨려서 찍힌 글자들을 액자에 걸어서 예술품 행세를 시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양이 들어있는 상자가 생각이 났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상자. 해리 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창고방의 '욕망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내가 느끼고 싶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 있다면 어떨까? 그림을 볼 때마다 그때그때 기쁨, 슬픔, 애틋함이 다르게 보이는 작품이 가능할까? 보는 사람에 따라 누구는 행복을 느끼고 누구는 우울함을 느끼는 그림이 가능할까? 누구는 가슴이 따뜻해지지만 다른 누구는 짜증을 내게 되는 그런 시가 가능할까?
이것은 칼로 잘라 대답할 수 없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그런 것을 작품이라 불러도 되느냐는 질문은 논점을 벗어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묻는다면, 한 가지의 전제가 유효하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대답하겠다. 피카소가 푸른 커플을 그린 그림을 보고 행복하다가 슬프다가 할 수 있다. 헤어진 두 사람, 한쪽의 짝사랑이었다는 점은 제쳐두고, 그 둘이 함께 그림 안에서나마 연인으로 존재하기에 따뜻한 그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 못하기에 애써 그림으로라도 그려본 것이기에 슬프다. 푸른 배경이기에 슬프다. 그러나 그 나체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인간의 감정을 넘어선다. 같은 시도, 학창 시절 그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친했던 친구가 생각나서 기쁘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류라면 내용상으로는 매우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시의 예에서 보듯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시점에서 서로 다른 판단 기준과 경험들의 복합체로서의 인간의 관점으로 여러 가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것을 작가가 우연에 기대어 노리면 안 되지 않을까? 인생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자기의 작품이 누군가의 인생에 들어갈 때 어떻게 느껴질지는 기대할 수는 있어도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말 아무 의도를 담지도 않고 '이걸 보고 뭔가를 <느끼고자 한다면> 뭔가를 느낄 것이다.' 같은 감정의 사이비 예언자 같은 예측은, 틀리고 맞고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예측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만드는 의도는 감상하는 사람의 느낌과 별도이며, 의도는 읽히거나 읽히지 않거나 정확히 작품 안에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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