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문장

by 루펠 Rup L

오랜만에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며칠 동안 일교차가 심해서 체력이 많이 떨어졌던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봄다운 날씨를 맞이하는 기분입니다. 4월에는 여름 같은 날씨도 있었는데 비가 내리고 나서 유독 서늘해졌던 느낌입니다. 너무 더운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일정하지 못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조금 서늘한 날은 저 혼자 반팔이었습니다. 그런 날도 더운 시간에는 다들 반팔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들 여벌의 옷을 가방에 넣어 다니거나 회사에 보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집에서 입고 나온 옷을 하루 종일 입는데 말입니다.
기분이 좋으니 제가 쓴 글도 가만히 다시 읽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한 번 쓴 글은 다시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던 그 순간의 기분으로 돌아가볼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고 싶을 때가 되면 아마도 글을 즐겁게 쓰던 때가 그리울 정도로 우울하거나 기분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가끔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왕조차 다시 읽을 수 없게 한 기록이지만 철저하게 관리는 했습니다. 사관은 빠짐없이 적고 편찬위원회는 기록 중 무겁고 가벼운 것을 가립니다. 그래서 무거운 것들만 모아 한 권이 완성되면, 수정을 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그대로 유지가 되고, 관리하도록 오지에 배치받은 사람들만이 주기적으로 펼쳐서 햇빛에 말리기도 하고 바람을 쐬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읽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지만 발설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요. 어쨌거나 왕조차 다시 읽지 못하게 할 것이지만 철저하게 보존하고 보관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조선이 기록의 나라라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런 추상적인 개념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세에 대한 기록이라는 원리원칙에 의한 책임감이야 물론 있었겠지만, 왕도 읽지 못하는 기록을 길이 보존한다는 뜻은, 조선의 왕이 더 이상 세상에서 왕이 아닐 때는 읽을 수 있게 한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왕만 읽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니 백성들도 원칙적으로는 읽을 수 없는 기록이었을 테고요. 그러나 기록의 목적은 읽히기 위해서이니, 이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나라가 없어야 합니다. 국민들이 더 이상 조선의 백성이 아니고 더 이상 조선이 없어서 조선의 왕이 왕이 아니게 될 때, 그러니까 고려 이후에 세워진 조선처럼, 조선 이후의 국가에서 읽도록 쓴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더라도 왜 멸망했는지 한반도의 후세 국가에게 알려주겠다,라는 명목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남길 기록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선은 정말 무서운 나라입니다.
제 기록도 읽을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일단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록처럼 귀감이나 본보기가 될 만한 일들을 적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때그때 드는 생각들을 적을 뿐입니다. 제가 다시 읽지 않겠다고 하면 이 글들의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쓰다 보니 마치 제가 쓴 글들, 제가 세상에 내보내는 문장들에게 대단히 미안해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세상의 빛을 보여주었지만 그뿐, 다시 가두어 놓는 셈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기록은 그 자체로도 소중합니다. 자음과 모음의 무작위적인 결합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은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언젠가 제 글들을 모으면 그 의도가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저도 알지 못하는 커다란 의도가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게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해도 계속 쓸 것이기는 합니다. 텅 빈 우주를 주시하는 더더욱 비어 있는 블랙홀처럼 종이는 글자를 끌어들입니다. 우리가 글자를 읽듯이 글이 있어야 했던 종이 역시 세상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종이에게 글자와 문장을 주고 종이는 세상에 그 문장을 보여주며 세상의 일부임을 자청합니다. 우리의 세상은 현실과 문장입니다. 그 문장은 현실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기도 합니다. 현실에 속하는 문장은 종이 위에, 인터넷 공간에 마음껏 새겨져 세상 곳곳을 누립니다. 현실에 속하지 않는 문장은 현실에 나올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의 영혼 속을 떠다닙니다. 문장들에게는 세상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문장이 있는 그 세상이 우리의 현실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것은, 문장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들에게 머릿속 공간을 내어 주고, 또한 세상에 내보내 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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