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40년

by 루펠 Rup L

뭔가를 검색하다가 성경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얼마 전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연극을 보고 온 터라 광야에 대한 생각을 간간이 하고 있었는데 마침 광야에 대한 글이 나왔던 것입니다. 평소 같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만 파악하고 넘어갔을 텐데, 거기서 생각이 자연스럽게 구약에서 이스라엘인들이 40년 동안 헤매던 그 광야로 가서 닿았습니다. 40년의 시작은 그 전의 시작에 의한 것이고 그 전의 시작 역시 최초의 시작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시작'은 창세기의 첫 부분이고, '그 전의 시작'은 창세기의 뒷부분입니다. 사람이 창조되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 처음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보기 전에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야 인류의 호기심 때문에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존재로서의 배경은 그 아담과 하와의 그 시기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 인류가 생겨나서 세상을 파악하기 전에는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창세기의 시작은 아담과 하와가 생겨나면서부터이고, 그전 부분은 단지 아담과 하와가 인식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적인 배경 안에 인류가 처음으로 담긴 것이 최초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집트, 인류사적인 배경 안에 인류사적인 사건을 담당할 인류, 이스라엘인들이 담겨진 것이 두 번째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배경이 갖추어진 후에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를 떠나 인류사적인 배경에서 신적인 배경으로 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전에도 마찬가지로 신적인 배경은 최초의 시작부터 있어왔겠지만 인류사적인 배경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고, 이제서야 인류사적인 배경을 벗겨내고 신적인 배경 안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단지 그 인류사적인 배경이 없는 곳이라는 것 외에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은 인류사적인 배경이 없으면 신적인 배경을 알아차려야 할 텐데, 광야를 떠도는 동안 일관되게 보여준 것은 계속해서 이집트를 대신할 또 다른 인류사적인 배경, 광야로 지리적인 위치만 바뀐 그런 것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었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했다거나 신적인 배경을 일찍 알아보았어야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식의 전환이라는 것은 늘 힘듭니다. 더욱이 이집트를 벗어나는 목적 자체에 대해서도 단지 '해방', '독립'이라는 말만 믿었다면 신적인 배경까지 따질 틈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일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을 하면서 원하는 것이 '상제님이 임하시는 천도교 지상왕국'이라고 했으면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 시대에서는 근대보다야 그런 개념이 당연하겠지만, "이집트에서의 노예신분으로부터의 해방 = 전통 종교의 부활"이라는 등식이 누구에게나 당연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은 그 개념의 싸움을 힘들게 이어온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율이 모든 삶에 내려앉고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갖춘 사람들의 집단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라의 기틀이 잡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는 뭔가를 위해 기다려온 것이 아닙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힘들었다고 해서 기다림은 아닙니다. 국가를 건설할 역량이 되지 않아 유목 집단에 그쳤던 것이 아닐까요? 신에 대한 반역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지만 결과적으로 그 전쟁들의 결과만 모아 놓고 보면 점점 이스라엘은 강해지고 있습니다. 점점 지파들의 공동 의식에서 전체의 공동 의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니 광야는 인류사적인 면에서는 부족 사회가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과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명, 모든 부족 사회가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놓고 보았을 때 광야의 의미는 처음부터 의도한 준비 기간이라기보다는 자체의 속성을 형성해 가는 기간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시간은 부족사회의 연합에서 벗어나 왕국이 되면서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파들은 광야의 시간이 남긴 흔적입니다. 광야의 시간은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기준으로 보면 새로운 시대이고 동시에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보면 탈출의 연장입니다. 마치 번데기가 유충의 연장이냐, 성충의 시작이냐를 두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둘이면서도 둘 다 아닌 상태입니다.
제 글도 제가 얼마동안이나 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글을 써 나갈지 모르겠으나, 그 기간 동안의 글들은 제가 글을 못쓴다고 믿었을 때, 계속 써 나갈 이유조차 알지 못할 때 쓰던 글들과 비슷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 글의 특성이 무르익어간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써 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제 글은 그 기간을 기준으로 전후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그 기간을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까지로 나눌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지금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까지 지금처럼 써 본 적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변화입니다. 없던 것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광야에서의 사십 년. 사십 년 동안 글을 쓰면 그 문장들은, 그 문장들의 창조자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요? 누구나, 언제나 어디론가 향하는 여정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글 역시 우리의 발자국입니다. 광야에 남기는 발자국은 우리가 현재 쓰는 글이며 그 발자국의 모양과 그 발자국이 향하는 목적지는 결국 발걸음과 함께하는 여정이 아니라, 그 여정의 훨씬 뒤에서 발자국을 따라오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여유를 가지고 이미 오래 지난 글들을 읽어볼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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