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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May 27. 2024

존재해도 되는 글

쓸모없는 글, 쓸데없는 글, 의미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진실을 호도하는 글을 읽으면 우리는 '나무야 미안해'라고 말한다. 그런 쓰레기를 읽히게 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나무에 대한 사과임과 동시에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한 의도적인 모욕이다. 그 글이 쓰레기라는 뜻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낙인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과 같이 의사소통 불가한 존재라는, 그러니 말을 해 보았자 소용없고 오히려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나무에게 사과하는 편이 더 낫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무에게 얼마나 덜 미안한 존재인가?
사실은 나무에게 전혀 좋을 것 없이 단지 사람이 서로와의 의사소통만을 위한 종이의 재료로서 나무를 베는 것 자체가 미안할 일이다. 그전에 어떤 용도로든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것은 미안해할 일이다. 사냥을 하면 우리에게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죽어간 동물들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 인디언들의 풍습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나 소와 돼지와 닭들에게 미안해하고 감사해하는가? 거기에 대한 감사보다는 그렇게 우리를 대신해서 일을 해 주는 사람들에 대한 노고에 더 큰 감사를 하지 않는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섭취되는 동물들에게 그럴 지경인데, 우리가 단순히 제품인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나무에게는 얼마나 감사하고 미안해하는가?
이미 우리의 개념 속에서 나무와 종이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다. 종이는, 신문지는, A4용지는 나무와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늘 들여다보는 휴대폰이나 컴퓨터의 화면과 더 비슷하게 인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가 나열되는 곳. 문자의 형태를 올려놓을 수 있는 배경.
그러니 '나무야 미안해'는 그런 쓰레기를 인쇄했기 때문이 아니라, 종이라는 존재를 나무라는 자연물과 떼어내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나오기 시작했어야 하는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가슴 깊이 했다고 해도, 문장을 종이에 쓸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종이에게는 선택권 없이, 인기가 좋다는 이유로, 꼭 여러 사람에게 읽히게 하고 싶다는 작가의 욕심으로 인쇄가 되고, 인쇄된 종이는 마치 낙인찍힌 거지처럼, 더 이상 새것이 아니게 된다.
나무를 희생해서 만든 종이, 그리고 그 종이를 희생해서 만든 글의 비석. 내 글은 과연 그 비석을 채우고 나서도 그 종이를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한때 종교에 회의적이었을 때는 매달 쏟아지는 종교 서적들, 각종 불경들과 기독교 성경들을 포함해 마음과 정신과 종교와 신앙과 저 세상에 대한 모든 글이 한심하고 불쾌하게 여겨졌다. 수많은 유익한 책들을 인쇄했어야 했을 종이들을 가로채어 의미 없는 글자들을 새겨 넣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사람들 반드시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고 팔리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그 책을 인쇄하지 않는다고 한들 소용이 없다. 더 많은 재화가 투입되고, 그 책들의 중고가는 하늘을 뚫고 치솟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거두어들인 것으로 만들어지는 자본이 그런 책을 구입하는 데에 다시 사용된다는 것은 나무를 베어 그런 책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나무를 베지 않으면 그 자본 그런 책을 사는 데에 점점 많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시 자랄 나무를 희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피로 쓰는 글이라는 말이 있다. 내 글은 절대 피로 쓰여지지 않는다. 쉽게 쓰여졌고, 마음 가는 대로 쓰여진다. 그렇지만 피로 썼다고 확언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해서 모두가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사람은 존엄성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엇을 바쳤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인기 있는 글은 정해져 있고, 그 정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 역시 선택을 받거나 선택을 받지 않거나 나의 것들 중 내보일 수 있는 것을 쉬지 않고 내보일 뿐이며, 한때 죽어라 짜내어 써버리고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상태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글이라도 돌만 가득한 시내에 물이 계속 흐르듯이 계속해서 써 나갈 것이다. 책이 된다면 나무에게 미안하다고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모니터로 보는 동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걸 유지하기 위해 전기를 만들어야겠지만, 내 글을 읽는다고 보내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 전기를 만드느라 오염된 공기에 대해 내가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글은 짧게 읽으면 끝이지만 쓰레기 같은 매체로 따지면 내용도 쓰레기이면서도 한참 동안 컴퓨터를 사용하게 하는 동영상이 훨씬 많다.
그래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헛된 꿈을 꾸게 하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보다 나무에게 당당하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내놓아도 솔직한 글이며, 거짓이라고는 없다. 당신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조차 진실이다. 그런 글은 세상에 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옮긴 문장은 세상에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그런 건 있는 편이 낫다. 하지만 있어서는 안 되는 글은 아니다. 나무에게는 미안할지 몰라도 출판, 전기 쪽 업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 않다. 써야 하는 이유가 글의 내용과 상관없는 내 돈벌이인 것도 아니고 인기를 끌기 위해서도 아닌, 말 그대로 글의 내용을 보여주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나무에게까지는 미안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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