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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May 28. 2024

즐거운 외출

오후 휴가를 내어 볼 일을 보고 나서 시간이 남아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카페에 가서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를 시켜 놓고 글을 썼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것은 그렇게 큰 로망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는 실내에 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작은 호텔방에 처박혀서 간혹 창밖만 내다보고 다시 글쓰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글쓰기이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쓴 카페는 3층짜리였고 3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는데 창문을 모두 빼버려서(한쪽으로 모두 접어서 모아놓게 되어 있었다)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완전 열린 공간이었다. 글에 집중하다가 간혹 고개를 들면 창밖으로 다른 카페들과 먼 빌딩들과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보였다. 상관없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쳐다보면 눈을 피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글을 쓰게 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좋다. 세상과 나와 내 글, 셋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 하늘이 그렇게 파랗고 맑았지만 날씨가 좋다는 것보다도 술술 써지는 글이 기분이 좋은 그런 날. 하지만 날씨로 인해 글을 쓰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는 날. 햇빛이 테이블 위에 밝게 줄무늬를 남겨도 좋다. 적당한 바람이 종이를 팔락거리게 하는 것도 좋다. 그런 시각적인 매력과 청각적인 유혹은 자연 그대로 느끼는 시간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좋은 이유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풀어 주기 때문이다. 여름날 야외에서 하늘을 보며 의자를 뒤로 젖혀놓고 멍하게 있을 때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들은 풍경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까지 당당히 기어 나온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 할 필요가 있는 것, 하는 게 유리한 것, 해도 되는 것들을 우선순위라고 부르며 줄을 세울 때, 자연은 우리에게 그저 한 템포 쉬어 가라고 말한다. 글을 쓸 때도 그렇게 한 걸음 물러서서 섣불리 키보드에 손을 대는 것을 자제해야 하기에 자연을 바라보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비슷하다. 글을 쓰는 것도 우리의 생각을 바라보아야 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것과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글을 쓰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향만 다르고 실로 같은 것이다.
햇빛은 따갑지만 공기는 시원해서 전체적으로 사람에게 알맞은 날씨였다. 달콤한 케익은 쓰디쓰고 뜨거운 커피와 잘 어울렸다. 그 모든 것이 섞여 있는 테이블과 공기 중 사이에 화면과 키보드가 놓이고 그 위에 내 손이 올라갔다. 햇빛과 공기와 케익과 커피와 키보드, 그리고 글, 그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 우유 사이사이로 커피가 스며들듯 섞여 들었다. 글의 분위기에 그것들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모른다. 내가 일부러 부릴 수 있는 기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그런 글이 나와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을 믿는다, 같은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나와 내 글은 나름 일정 시간 동안 함께했기에 경험상 아는 것들이다.
커피와 케익을 즐기는 데에는 작은 방에서 글을 쓰는 것보다는 비용이 제법 들었다. 케익과 커피가 모두 비싼 집이었다. 나름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는 유명한 카페여서 한두 번은 와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비싸도 좁은 호텔방만큼 글을 쓸 수 있으면서 호텔방보다는 저렴했다. 하지만 호텔방에서는 글을 쓰다가 잠이 들어도 되고 새벽에도 일어나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지만 카페는 커피를 무한정 마실 수도 없고, 24시간 운영하는 곳도 아니니 가성비로는 비할 바가 아니다.
카페도 카페 안의 사람들과 수없이 눈이 마주칠 수 있는, 그러니까 마주 보는 자리가 사방에 있는 곳에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이번처럼 창가에서 창문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한 이유이다. 어쩌면 호텔방도, 집도, 벽을 바라보며 글을 쓰기에 글쓰기가 즐거운지 모르겠다. 내 글 외에는 생각할 필요 없다는, 일종의 방호벽이 있는 환경이니까. 카페는 그런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커피도 아니고 케익도 아니다. 뭔가 밖에서 글을 쓴다는,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글쓰기에는 전혀 필요가 없는 느낌이지만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고 사람들 안에 있는 듯한 안정감과 소풍온 듯한 기분 때문이다. 소풍. 그것이 맞는 것 같다. 글을 써야 하니까, 자꾸 내보내 달라고 외치는 생각들이 있어서, 내가 글로 뭔가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쓰는 글이 아니라 즐거운데 좋아하는 게 하필 글쓰기라 즐거울 때 글을 쓸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소풍을 가서 김밥이 너무 맛있는데, 몇 시간을 굶어서 시장이 반찬인 것도, 특별 소스가 들어간 비법이 있는 김밥이라서도 아니고, 그저 소풍이라서 유독 더 맛있을 뿐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나는 소풍을 다녀왔다. 집안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사람들 모르게 그런 식으로만 글을 쓰다가 처음으로 야외로 나가서 글을 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러브 액추얼리에서 호숫가에서 글을 쓰던 콜린 퍼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는 타자기였고, 종이에 글을 썼기에 종이를 눌러 놓은 돌을 꺼내놓자 종이들이 온통 휘날렸다. 나는 글이 그렇게 날아갈 리는 없었지만 똑같이 야외의 자유로운 바람은 느꼈다. 그에게, 종이가 모두 날아가 허탈감을 느끼게 하기 전까지, 한창 글을 열심히 쓸 때까지의 그 바람이다. 축복받은 것처럼 맑은 봄날씨에 딱 알맞은 바람. 마치 영화 주인공이 된 듯한 우쭐감과 그 기분 속에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 잘 써지는 글까지, 환상적인 외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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