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추품종의 세계
설을 기점으로 고추농사가 시작되었다. 종묘상에 고추씨를 사러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환상적인 고추품종들이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들은 바가 있어 물었다.
-<남자의 자격>이 괜찮담서요.
-고추는 뭐니뭐니해도 커야지요. <남자의 자격>은 이름값합니다.
-<군계일학>은 어때요?
-올해는 <대권선언>을 권합니다마는.
그러니까 <남자의 자격>, <대권선언>은 우리가 매운 고추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청양고추>처럼 하나의 품좀.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지만 <대권선언>의 씨는 따로 있는 것이 고추종자의 세계인데 이 세계도 나름의 생태계가 복잡하다.
자라나는 고추의 기세를 강조한 품종들은 <백전백승>, <만사형통>, <신화창조>. 실속을 강조한 품종으론 <마니따>, <배로따>, <무지따>. 병해에 강한 품종으로는 <안전벨트>, <싹쓸이>.
복잡할수록 전문가를 따르는 것이 순리. 주인이 권하는대로 <남자의 자격>과 <대권선언>을 샀다. 작년에 부모님이 심었던 <무한질주>는 올 겨울 잦은 눈비로 보건대 맞지 않을 거란 전문가적 진단도 덤으로 들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봄가뭄과 기상이변, 그로 인한 병해의 창궐, 거기에 맞는 품종별 장단점 등을 다 이해하자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고추농사로 보내야하나 아득해 하고 있는데 농협 다니는 친구의 전화가 왔다.
“고추씨를 벌써 샀어? 농협에 씨값 50% 보조되는 품종이 있는데.”
덧붙여 고추씨는 죄 중국에서 채종하는데 같은 씨를 두고 종묘회사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다른 값에 파는 거라는 비밀도 전했다. ‘믿거나 말거나’라는 단서가 달렸지만 나는 고추씨의 비밀을 믿기로 했다. 고추품종의 갈피 없는 작명기준이 단번에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각각 다른 종묘회사임에도 같은 씨가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이 일관성 있는 섹슈얼리티를 보란 말이지
<카사노바>, <글래머>, <아크다>, <기세등등>, <파워스피드>, <슈퍼엄청나>, <만루홈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