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쳤어도 사카타까지

일본종주 11일 차 : 아키타~사카타(115Km)

by 루로우


좁고 불편한 넷카페 부스 때문인지, 알람 없이도 새벽 4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어제 붙여둔 밴드를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과 함께 찬찬히 뜯어보았다. 피부에 파묻힌 것 같았던 반투명색의 검은 점들이, 퉁퉁 불은 손가락에서 까맣고 선명하게 밀려 나와 있었다. 효과가 있었다! 베이킹 소다 때문에 삼투압의 원리로 가시가 밀려 나온다고 했는데, 역시 과학의 힘은 위대했다.


손톱깎이로 하나하나 가시를 뽑았다. 꼭 원숭이가 꼭 털 사이의 이를 잡아내듯 2시간 동안 가시와 씨름을 벌였다. 어느 정도 큰 가시는 많이 뽑았지만, 작거나 잘 보이지 않는 몇몇 잔가시가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넷카페는 시간제이기에 오래 있다간 요금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언제까지 가시만 뽑겠다고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수십개를 뽑았는데 여전히 남아있었던 가시들...


나름 큰 도시인 아키타에서의 추억은 명물 요리가 아닌 체인점 규동과, 호텔이 아닌 넷카페에서의 숙박뿐이었다. 어제 낙차만 없었더라면 여유롭게 아키타에 도착해 명물도 먹고 명소도 돌아봤을 텐데. 가고 싶었던 곳들 모두 다음을 기약하고 아키타를 뒤로 하고 떠났다. 내 인생에서 언제 다시 아키타에 올지 싶지만.


시내를 빠져나와 동해바다를 따라 쭉 이어지는 7번 국도로 진입했다. 사흘 내내 내린 비 탓에 인도는 젖은 나뭇잎과 썩은 나뭇가지들로 뒤덮여 있었다. 정확히 그런 길에서 미끄러져 자빠진 어제의 악몽을 다시 되새기며, 속도도 내지 못한 채 천천히 조심스럽게 라이딩을 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국도에는 통행량도 그렇게 많지 않아 차량을 신경 쓰지 않고 쌩쌩 달리기 좋았다. 하지만 바다 풍경은 기대와는 달리 큰 감동은 없었다. 제주도나 홋카이도에서 본 낭만적인 바다를 기대했다면 큰 착각이었다. 일부러 바닷가에 딱 붙어 있는 길로 향하기도 하고 자전거를 세워두고 해안가로 걸어 나가보기도 했지만, 상상했던 해수욕장이 아닌 황량한 바닷가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 파도에 떠밀려온 너저분한 플라스틱 쓰레기, 그리고 인기척 하나 없는 쓸쓸한 해변….



정오쯤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 유리혼조를 지나 니카호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사카나야상’이라는, 직역하자면 ‘생선가게’라는 굉장히 직설적이고 심플한 이름의 가게였다. 이런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은 작은 마을에도 가게는 만석인지 사람들이 가게 앞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석에 앉아 헬멧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버프는 땀에 절어서 짜면 땀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한 부부가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져지 위에 로카티를 입고 있었으니 한국인인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젊은 한국인이 이런 난데없는 시골의 가게에 자전거 의류를 입고 왔으니 내가 봐도 별나게 보였을 것이다.


“자전거 타고 어디서 오신 거예요?”


부부 중 아주머니 분께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어제는 히로사키였고 오늘은 아키타에서 이제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 종주 중이여서요.”


“그럼 어디에서 출발한 거예요?”


“홋카이도의 왓카나이에서 출발했습니다.”


“왓카나이… 홋카이도의 끝이죠? 대단하네요! 그 상처는 다친 거예요? 어쩌다가?”


“어제 비가 와서 빗길에 미끄러져서요.”


“아이고, 저런… 어제 우리 집에서 자고 갔으면 좋았을 걸.”


아주머니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너스레였지만 정말 그랬었더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여행 유튜브를 보다 보면 유튜버들이 현지 사람들과 친해져서 집에 신세를 지는 영상을 많이 봤었는데 왜 나는 그런 일이 없을까?


“혹시 한국은 가 보신 적 있으세요?”


“아, 저희 딸이 작년에 이화여대? 그 대학교에 교환학생을 갔다 왔거든요. 그때 겨울에 한 번 갔어요.”


“정말요?”


어떻게 한국에서 유학한 딸을 둔 일본인과 이 시골 마을의 음식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운명이.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친절히 아주머니가 내어 주는 저녁을 먹으며 딸과도 인사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는 몹쓸 상상의 나래까지 펼치고 있었다.


“한국 겨울 진짜 춥지 않았어요? 일본은 따뜻한데.”


“맞아요. 12월인데도 정말 춥더라고요.”


한국에서 일본인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일본에서 제일 맛있었던 음식은? 이렇게 일본인과 길게 대화한 적은 처음이었다. 한국을 떠난 이후 오랜만에 살갑고 긴 대화를 하니 웃음도 나고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이방인이었던 내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는 두 분에게 정말이지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게의 주 메뉴는 오마카세 정식이었다. 그날그날 들어온 생선을 직접 손질해서 회로 내어놓는다. 수산 시장에 온 것처럼 가게 안에는 온갖 생선들이 얼음이 가득 담긴 스티로폼 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가게 주인은 안쪽 주방을 오고 가며 생선을 손질하 있었다. 무려 이런 신선한 오마카세 정식을 단 돈 1,200엔에 먹을 수 있다는 것. 한국의 회 가격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싱싱한 회를 따뜻한 밥에 얹어 먹자 그만한 행복이 없었다. 점심을 먹어치운 후, 먼저 들어온 부부보다 더 빨리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작별인사를 건넸다. “조심해~”라는 응원의 목소리와 함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안장에 올라탔다.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무의미한 라이딩을 이어나갔다. 채도를 잃은 듯한 풍경, 가끔 지나가는 인적 드문 일본의 시골 마을들, 황량한 바다 풍경의 연속.


일본에 온 지 2주가 지나자 이제 이 모든 풍경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일본 시골 감성은, 이제 내게는 그저 매일 지나치는 등굣길 같은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일본 시골 감성에 열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이제 현지인들처럼 이 풍경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저녁 5시 정도가 되어 오늘의 목적지인 사카타에 도착했다. 어제 넷카페에서 잔 대신에 오늘은 큰 마음을 먹고 7,000엔 정도의 호텔을 잡았다. 팔다리에서 손가락까지 만신창이가 된 이런 몸으로 연달아 게스트하우스나 넷카페에서 묵기에는 힘들었다. 편안한 잠자리에서 푹 쉬면서 체력과 상처를 얼른 회복해야만 했다.


호텔에는 온천도 있었다. 들어가 보니 말이 온천이지 사실상 조그마한 목욕탕이었다. 상처가 뜨거운 물에 닿자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너무 아파 탕에서 후다닥 뛰쳐나왔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만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손가락을 30분간 물에 담가 가시를 불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 아침 가시가 빠지고 핏자국으로 검게 변한 부위와, 남은 가시를 구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손톱깎이로 가시를 빼보려고 했지만 이미 가시를 뺐던 자리의 살갗을 집고 뜯어내기 일쑤였다.


그냥 타다가 손이 찌릿하면, 그게 가시겠지. 그때 빼자. 포기다. 아, 내일은 어디까지 가야 하지? 결국 160킬로 떨어진 니이가타를 목적지로 잡았다. 이틀 뒤 비 예보가 있어 이번에는 작은 도시보다는 큰 도시에서 하루를 쉬어가고 싶었다. 상처에 붙였던 밴드는 새 밴드로 교체하고 다시 약을 발랐지만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너무 아팠다. 잠도 다치지 않은 쪽으로 몸을 돌려서 불편하게 잘 수밖에 없었다.






제 블로그에서도 더 많은 사진이 수록된 사진 여행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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