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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Feb 18. 2024

아키타에서의 낙차 사고

다친 나를 선뜻 도와준 일본 사람들

  토요일 아침이었다. 짧다면 짧은 3일이었지만, 정든 히로사키를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도쿄도, 오사카도 아닌 이곳 작은 히로사키라는 도시에서 비가 와서 움직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나는 나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하던 며칠 전을 떠올렸다. 느긋하게 좀 더 여유를 즐기며 쉬어갈걸.


아키타시까지 가는 중간에 마땅히 머무를 도시가 없었기에, 오늘 하루 안에 160km나 떨어진 아키타시까지 갈 갈 작정이었다. 아침 6시에 일찍 일어나 출발을 준비했다.



잠시 날씨라도 볼 겸 호스텔 정문을 열고 나가 하늘을 보자, 비가 그친 하늘 위로 한 줄의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있었다. 작년까지 29년을 살아온 이래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무지개를 본 적이 없었다. 30살에 간 군대에서 무지개를 인생 처음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일본에 와서 무지개를 바로 보게 되다니. 3일 만에 다시 출발하는 라이딩, 하루의 시작부터 기운이 좋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비가 그친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금방 그치겠지, 하고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갑자기 비가 기세를 바꾸더니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횡단보도 건너편에 보이는 주유소의 지붕 아래로 빠르게 피신했다.


갑자기 내리는 걸 보니 소나기인 듯해서, 조금 기세가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30여 분을 기다렸으나 잦아들긴 했지만,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고민하다가 결국 곧 그치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비를 맞고 자전거를 탔다. 160킬로를 달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등교하는 일본의 남학생들이 보였는데, 우산이나 우비도 없이 교복 위에 후드 집업만 뒤집어쓰고 등교를 하고 있었다. 홋카이도 대학에서도 그렇고, 일본인들은 자전거를 타면서 비 따윈 개의치 않는 것 같아 보였다.

히로사키에서 멀어질수록,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녹지들이 간간이 보이던 풍경은, 산과 넓은 자연 사이로 드문드문 공업용 같은 건물이나 주유소 따위가 보이는 풍경으로 변해갔다. 비도 완전히 그치고, 먹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열렸을 때, 비 온 후의 안개는 마치 지상으로 내려온 구름처럼 산을 휘감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자전거를 타며 이런 시골 풍경을 많이 보았는데... 어느 정도 국도를 달렸을 때 멀리 파란 표지판에 7번 국도, 아키타 현, 오다테 시라는 문구가 보였다. 옆에는 꼭 진돗개를 닮은 개 그림이 있다. 아키타 현에 개가 유명한 것일까?


아키타 현 표지판과 아키타 현의 오다테에 있는 개 박물관

개 박물관도 있었다. 알고 보니 아키타 개가 견종으로 굉장히 한국의 진돗개처럼 유명한 종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치 이야기>의 하치의 품종이 바로 아키타견이라고 한다(도쿄 여행 중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가보았다면 다들 한 강아지 동상을 보았을 것이다).


오다테를 지나가며, 중간중간 보이는 편의점에 들러서 음료나 간식거리를 사 먹기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라이딩을 이어갔다. 사실 오늘 어디서 숙박할지 정하지도 않고 출발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3일 전에 보았던 이 날의 아키타에도 싼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 같은 숙소가 마땅히 보이질 않았다. 숙박료 4천 엔의 게스트하우스가 보여서, ‘너무 비싼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예약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마저도 전부 사라져 버리고 호텔만 남아버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모르겠다. 그냥 진짜 잘 곳이 없다면 넷카페에라도 가면 되겠지… 하지만 한 번도 넷카페에 가본 적이 없고, 외국인을 허락해주지 않는 점포도 있다고 해서 굉장히 가기 무서운데….






아키타를 100km 남긴 시점, 기타아키타라는 마을을 지나면서였다.


지도로 보면 완전히 산지를 통과했지만, 그렇게 가파른 오르막이 없어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오늘 이 정도면 저번 홋카이도처럼 160km를 가뿐히 달릴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신나게 페달을 밟을 때였다. 비는 그치고 날씨는 맑았지만, 도로 갓길은 3일간 내린 비로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인도 위를 타고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되자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지는 그때, 자전거 앞바퀴가 꼭 바나나껍질을 밟은 것처럼 쓱, 미끄러지며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자전거가 붕 뜬것만 같았다. 꼭 슬로모션이 걸린 것처럼. 나의 머릿속으로는 ‘아. 낙차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 생각이 끝이 나기 무섭게 내 눈앞 시야는 도로의 젖은 바닥이 보이고 있었다.


자전거는 그렇게 옆으로 나자빠졌다. 나는 자전거에서 튕겨 날아가 갓길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에 얼굴을 포함해 온몸을 반쯤 처박았다. 꼭 내동댕이 쳐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3초 간은 정신이 아득해져서, 그대로 몸을 처박은 채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유유히 차들은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지나갔다. 조금만 더 차도 쪽으로 날아갔어도 차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겠구나라는 안도와, 동시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구나…’라는 원망 아닌 원망이 들었다. 어차피 차도 아닌 내가 잘못해서 사고가 난 것이니까. 그저 누군가가 도와주었으면 하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머리가 외치는 일종의 절규였다.


겨우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자, 마치 고통이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전신이 마비될 듯한 얼얼한 아픔이었다. 욕이 자동반사로 나올 정도였다. 먼저 다친 부위를 확인했다. 오른쪽 팔꿈치와 오른쪽 다리의 살점이 뜯겨나가 있었다. 물웅덩이에 처박힌 온몸은 얼굴부터 다리까지 절반이 젖었다.


휴대폰이 왼쪽 주머니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전거에 달아두었던 액션카메라도 다행히 다친 곳 하나 없었다. 몸이 다친 와중에도 전자기기를 더 소중히 살펴보고 있다니...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보조배터리가 물에 젖어 생전 처음 보는 패턴으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한 발자국을 내딛기도 힘든 나는 매우 천천히 자전거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도대체 뭐 때문에 미끄러진 거지…?’


고꾸라진 자전거를 서서히 일으켜 세웠다. 인도 위는 젖은 나뭇잎과 썩은 나뭇가지들로 엉망진창이었다. 내리막에서 속도가 가해지면서, 썩은 나뭇가지에 미끄러진 것이었다. 넘어졌을 때를 기억해 보면, 국토종주 때 자전거 고장 문제로 한 번, 비가 올 때 미끄러운 나무데크 위에서 한 번, 그리고 고라니에게 부딪혀서 한 번이었다. 각자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었다. 하드웨어의 문제, 비 오는 날의 문제, 야생동물의 문제... 하지만 오늘은 또 다른 문제로 낙차를 했다. 마치 신은 내게 "아직 다른 이유도 있어!"라며 이런 일을 만든 것처럼...


어쨌든 3000km씩이나 달리는 데 낙차 사고 한 번쯤은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예상을 했어도 갑작스러운 사고에 경황이 없었다. 그렇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던 도중 갑자기, 나와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던 검은 차량 한 대가 속도를 늦추더니, 차창을 내리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 순간만큼은 나는 꼭 강한 척 허세라도 부리 듯이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말을 듣고 차가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U턴을 하더니 내 쪽으로 와서 정차를 했다. 운전하던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과 동승하고 있던 여성 두 명이 내리고는 자전거는커녕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많이 안 다쳤어요?”


“차에 휴지 좀 있는지 보고 갖다 줘.”


“아, 저는 정말 괜찮은데… 가셔도 됩니다.”


다른 여성은 차로 다시 돌아가더니, 차에 있는 휴지란 휴지는 전부 다 가져온 것처럼 두 손 잔뜩 휴지를 가지고 와서 내게 건넸다. 나는 연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일단 이곳저곳 묻은 흙들과 젖은 몸을 닦아냈다.


“갈 수 있겠어요? 자전거도 고장 난 거 아닌가?”


자전거는 충격으로 인해 체인이 풀어져 있었다. 남성이 맨손으로 체인을 만졌다. 그의 손이 순식간에 시꺼먼 오일로 더러워졌고, 나는 깜짝 놀라서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지만, 남성은 아랑곳 않고 자전거의 체인을 고치려고 했다.


“한국 사람이세요? 괜.찮.아.요?”


한 여성의 한국어를 듣고는, 나는 놀란 표정으로 “한국어도 할 줄 아시나요?!”라고 했다. 다친 와중에도 한국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연락처라도 물어볼 걸 그랬지만, 사실 일본 번호에 연락을 해보지 않아 그냥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내가 보답한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일본 번호든 코스타리카 번호든지 어떻게 알고만 있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안부와 감사의 문자라도, 혹은 주소를 물어봐서 선물이라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기타아키타의 7번 국도 한가운데에서, 쌩쌩 지나가는 차들 사이에서 선뜻 차까지 돌려서 세워가며 자전거를 타던 한 이방인을 도와준 세 명의 은인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언젠가 내가 이 글로 책을 낼 수 있다면 꼭 그분들에게 책이라도 보내줄 수 있다면...






그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다시 페달을 밟았다. 또다시 미끄러질까 무서워서 일정 속도 이상 밟기가 어려웠다. 마땅히 응급처치를 할 약이나 밴드가 없었기에, 다친 상처를 어떻게 해결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시 국도를 라이딩해야만 했다.


힘겹게 무거운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오른쪽 무릎에서는 피가 줄줄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미치노에키 1km>라는 간판과 함께 이윽고 휴게소가 나타났다. 미리 가는 길목에 알아봐 두었던 곳이었기에, 이곳에 들러서 약이라던지 밴드라도 사서 응급처치를 할 생각으로 들렀다. 나는 휴게소 내부의 마트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걸어가 작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여기 밴드는 안 파나요?”


라고 물었지만,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마트에는 전부 농산물이나 과일만 팔고 있는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조차 산길의 한가운데였기에, 상처를 치료하려면 몇십 킬로를 더 지나 편의점과 드러그스토어가 있는 도시로 가야만 했다.


나는 화장실로 갔다. 장애인이 아니었지만 급한 나머지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가 휴지를 잔뜩 뽑은 후, 흐르는 물에 팔에 있던 상처를 씻어냈다. 휴지로 톡톡 파우더로 두드리듯이 피와 남은 흙먼지들을 닦아냈다. 그때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은 참 암담하고 불쌍해 보였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 몇몇 사람들이 앉아있던 휴게소 로비의 빈자리에 앉았다. 몸뿐만이 아니라 사고를 수습하고 신경을 쓰던 마음과 정신도 지쳐버린 것 같았다. 쉬고 싶었다. 휴게소 바깥엔 갑자기 다시 미친 듯이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아까 내가 질문을 건네었던 휴게소 직원과 똑같은 직원 복장을 입은 한 젊은 남성이 내게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하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괜찮으세요? 혹시 이거 필요하신 거 아니신가요?”


그의 손에 있던 것은 휴게소에 상비된 듯한 응급처치키트 상자였다. 나는 그런 휴게소의 유일한 응급처치키트를 사용하려면 거의 다리가 절단된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나, 나 같은 타박상 정도 따위가…라는 생각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괜찮습니다. 그거 쓰면 안 되지 않나요?”라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크게 다치신 거 아닌가요? 써도 괜찮습니다!”라며 응급상자를 급히 열기 시작했다.


상자에는 약과 밴드뿐만이 아니라 작은 흰 수건도 있었다. 내게 피를 닦으라고 흰 수건을 그는 건넸다. "피가 묻으면 더러워질 텐데 괜찮습니다." "아뇨, 그냥 가지세요. 가지셔도 괜찮아요."라며 그가 말했다. 바로 옆에 있던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이가 꽤 있어 보이던 할머니 두 분도 담소를 멈추고는 이 쪽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 할머니들이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쪽으로 와서는,


“아이고. 학생. 많이 다쳤는가?”


라고 말을 걸었다. 휴게소 직원이 꺼낸 약을 보고서는 약을 이렇게 사용하는 거라며, 할머니들은 나서서 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너무 감사했다. "한국인이야?" "네. 한국인입니다." 내 억양만 들어도 일본인들은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아맞히고는 했다.


“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간단한 회화 수준의 일본어로 내가 그 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그저 아리가또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뿐이었다. 자리를 뜰 때에도 웃으면서 할머니들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까지도 그분들은 환한 미소로 힘내라면서 응원의 한마디를 건네주었다.


 휴게소를 나가자 아까 내리던 소나기는 그치고, 나는 파란 하늘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상처 때문에 휴게소에 들른 타이밍에 맞춰 비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달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잖아? 다리의 빨간 상처들은 모두 하얀 반창고로, 지친 마음은 따스한 일본인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금세 회복되어 있었다. 다시 달려야 했기에 안장에 올라탔다. 다쳤든 말든 무조건 오늘 안에 아키타에 도착해야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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