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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Feb 19. 2024

일본 넷카페에서의 첫 숙박

일본종주 10일차 : 히로사키~아키타

  이름 모를 도시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노시로라는 도시였다. 확실한 것은 드디어 시골과 산길의 내륙을 통과하여 동해안의 도시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아까 전 미끄러져 다친 팔과 다리를 신경 쓰느라, 오후 2시가 되도록 점심도 챙겨 먹지 못했다.


맥도날드 간판이 보이자 바로 들어가서 가장 싼 '치키치 버거 세트'라는 메뉴를 주문하고서는 나는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전 포장지를 뜯고 붙였던 새하얗던 밴드들은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로 인해 빨간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 뒤도 다친 듯 쓰라렸지만, 옷을 벗을 수도 없는 이상 숙소에 가서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종업원이 주문한 버거 세트를 가지고 왔다. 일본 맥도날드는 특이하게 한국과 달리 종업원이 직접 메뉴를 갖다 주는 시스템이었다.


마치 맥너겟을 패티로 만든 듯한, 치키치 버거를 우적우적 멍한 정신과 함께 씹어 먹었다. 팔다리의 상처가 지르던 비명들도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우성이 잦아들자, 팔다리의 비명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또 다른 작은 목소리가 내 뇌에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손가락 끝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버거를 쥐고 있던 손가락을 펴서 바라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검은 점들이 피어나 있었다. 가시였다. 낙차 하면서 반사적으로 지면에 손을 내 짚었는데, 바닥에 있던 수많은 썩은 나뭇가지들의 가시 파편들이 손가락에 박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손가락을 누르자 피부 깊숙한 곳에서 가시에 찔리는 얼얼한 아픔이 증폭되어 왔다.


문제는 그 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엄지에도, 검지에도, 그리고 약지와 새끼손가락까지도.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빼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섬주섬 있는 손톱깎이라도 꺼내어서 손가락 피부를 뜯어보았지만, 쉽게 가시는 잘 잡히지를 않았다. 병원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보험조차 없는 외국인이다. 병원에서 진료를 볼 수 있다고 치더라도, 엄청난 병원비가 나올 것이 뻔했다.


영원한 자전거 종주 동료 구글에게 ‘손가락 가시 빼는 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구글은 곧바로 검색 결과를 내게 보여주었다. 무슨 연고를 발라라, 물에 불려라, 테이프를 붙였다 떼라, 심지어 바나나 껍질로 문질러라… 세상에는 가시를 뺄 수 있는 별의별 방법들이 있었다.


바나나를 사던 테이프를 사던, 일단 내린 결론은 숙소에 들어간 뒤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전거 드롭바의 핸들을 잡을 때마다 가시의 고통이 쓰라렸지만 참아야 했다. 가시를 뺀다고 지금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금세 어두워져서 아키타까지 야간라이딩을 해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북위 40도를 지나서 아키타 현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달려간다. 북위 40도면 이제 러시아 위도는 벗어났고, 북한과 같은 위도에 있었다. 위치상 동해안을 달리고 있었지만, 도로는 바다보다 좀 더 내륙 쪽에 위치해 있었기에 대신 노오란 논바다의 풍경만 끝없이 펼쳐졌다.

오른쪽 먼 곳에 풍차들이 나란히 보였다. 내가 어제 상상했던 오늘의 라이딩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바닷바람에 돌아가는 풍차들을 제치며 넓은 동해바다를 끼고 달리는 라이딩을 상상했는데… 하지만 바다 쪽으로 가게 되면 더욱 라이딩 코스가 길어졌기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다친 탓에 시간을 많이 끌었고, 오늘 안에 아키타 시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에, 한가하게 풍경을 음미하며 달릴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어둑해지기 전 아키타에는 도착할 수 없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사방은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사진을 찍을 여유도, 풍경을 둘러볼 여유도 없다. 숙소도 잡아둔 곳이 없었지만 얼른 달려서 일단 시내에 도착해야만 했다. 다행히 저녁 6시 반쯤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어플의 1만 엔 이상을 호가하는 아키타 시내의 호텔들을 바라보다가,


‘그래. 넷카페에서 자자...’


1만 엔을 숙박비에는 도저히 태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넷카페에서 한 번도 자 본 적이 없었다. 일본 넷카페에 관련된 몇몇 유튜브 영상을 돌려 보고는 일단은 부딪혀 보기로 했다. 공교롭게 넷카페에 가던 길에 대형 드러그스토어가 보여서, 이것저것 상처를 수습할 약과 밴드 등을 구입했다.


가시를 빼기 위해 베이킹소다를 찾는데, 점원에게 ‘베이킨-구-소-다’라고 물어봤지만 점원은 그게 대체 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그, 하얀 가루인데… 청소나 야채 씻을 때도 사용하고… 빵 만들 때도 사용하고…”


라고 어쭙잖은 일본어로 설명했다. 점원이 알아차렸다는 듯 나를 한 코너로 안내했다. “이거 맞으시죠?” “네! 맞아요.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나는 대답하고 냉큼 베이킹소다를 집어 들어 장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카이카츠클럽. 직역하자면 ‘쾌활클럽’이라는 다소 이상야릇한 이름으로, 주황색 간판에 적힌 가게명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자 로비가 있었다. 로비 한쪽에는 이용객들이 무료로 볼 수 있는 만화책들이 즐비해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무한리필 음료 가판대가 보였다.


넷카페는 시간 단위로 이용하는 시스템이었기에, 점원에게 오늘 12시간을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12시간을 정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먼저 들어간 뒤에 나중에 나올 때 시간이 정산되는 방식이다. 그러한 점에서였는지 점원은 내게 넷카페 이용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넷카페 이용이 처음이시라면 회원가입을 하셔야 합니다.”


점원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게 회원가입 용지를 건네며 말했다. 다소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한자 투성이의 회원가입 용지를 바라보았다. 여차저차 이름과 전화번호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적었지만, 나는 일본 주소가 없었다.


“아, 저 외국인인데… 주소는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라고 묻자,


“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말하고는 점원은 내가 주소만 쓰지 못한 회원가입 용지를 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꼭 차가웠던 점원의 첫인상이 떠올라서, '외국인은 안됩니다.'라는 대답을 가지고 올 것만 같아 살짝 불안했다.


마치 서울에 처음 올라온 촌사람처럼 넷카페 실내를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하며 10여 분 정도가 흘렀을까... 점원이 다시 나타나 내게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이 카드로 이용하시면 됩니다.”라고 하며 내 이름이 가타카나로 적혀 있는 회원증을 내게 건네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드디어 넷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고는 점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건넸다.


고작 넷카페 이용이라는 것뿐이었지만, 일본 사회에 한층 더 스며든 느낌이라 나는 낮에 다친 상처의 쓰라림도 잊은 채 싱글벙글했다. 이윽고 점원은 내게 배정된 부스로 안내해 주었다. 갈색의 칸막이로 배치된 부스는 제각각 안이 들여다 보이는 창을 가리기 위해 모두 담요를 문에 걸쳐두고 있었다. 그러한 희한한 풍경 속을 걸어가면서, 낯선 환경에 의한 어스름한 불안감이 가미된 기대감과 함께 나는 점원을 졸졸 따라갔다.


작은 부스에는 한 사람 몸만 뉘일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공간과 컴퓨터가 한 대 있었다. 부스 안에 들고 있던 갖가지 자전거 짐들을 토해내듯 쏟아냈다. 오늘 하루 라이딩도 끝났다는 안도감이 이제서야 밀려왔다. 제일 먼저 세면도구와 수건을 들고 샤워를 하러 갔다. 샤워를 하기 위해 밴드들을 다 떼어 내고, 입고 있던 져지와 빕숏을 벗었다. 라이딩 내내 쓰라렸던 허벅지 뒤편을 보았다.


손바닥만 한 상처로 시뻘건 허벅지 뒤편은 내가 상상한 이상으로 크게 쓸려 있었다. 쓸렸다는 표현보다 ‘갈렸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상처였다. 물과 상처가 만날 때의 따가움을 견뎌가며 나는 겨우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땀에 전 자전거복들을 뭉탱이로 코인세탁기에 욱여넣고는, 이제는 배를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와 터덜터덜 근처에 있던 규동 체인점으로 걸어가서 저녁을 먹고 왔다. 걸을 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관광으로 갔던 대도시들과는 달리 일본의 흔한 저녁거리는 정말 어둡다. 다들 퇴근 후에는 절대 외출하지 않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도 거의 잘 없다. 한국에 비해 턱없이 가로등이 부족한 느낌이라 암흑 속을 걷는 것만 같아 뒤에서 누군가가 해코지를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부스로 돌아와서, 공용 담요를 여러 장 들고 와서 누울 잠자리를 만들었다. 상처엔 약을 바르고, 대형 밴드를 붙였다. 이제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아까 사 왔던 베이킹 소다를 물 한 잔에 부은 뒤에 손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함께 사 온 밴드를 베이킹 소다가 녹은 물에 적시고는, 가시가 보이는 부위란 부위에 덕지덕지 밴드를 발랐다.


좁디좁은 작은 부스에 지친 몸을 뉘이자마자 잠이 솔솔 밀려왔다. 꼭 맹수의 습격을 받아 겨우 도망쳤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 어차피 더 이상 넷카페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저 눈을 감고 다음 날 눈을 뜨면, 팔다리의 상처의 통증은 가라앉아 있기를, 그리고 손가락에 박힌 가시파편들이 밀려 나와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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