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10일 차 : 히로사키~아키타 (162Km)
다친 다리를 움직여 산복도로를 지나 노시로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드디어 아오모리에서 시작된 기나긴 내륙 여정을 끝내고, 동해안에 닿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이제부터는 지도에서 바닷가 근처를 따라 쭉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사고가 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후 2시까지 점심도 챙겨 먹지 못했다. 노시로의 맛집이라든지, 아키타 현의 명물을 검색해서 먹으러 갈 여유 따위는 없었다. 도로변에 선명한 노란색 맥도날드 간판이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까 전에 붙였던 새하얗던 밴드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팔다리가 지르던 비명들도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익숙해진 고통이 사라지자, 손끝에서 또 다른 불청객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버거를 쥐고 있던 손가락을 펼치자 마디마디에 이전엔 없던 까만 점들이 피어나 있었다. 가시였다. 미끄러지면서 반사적으로 지면에 손을 짚었는데, 바닥에 있던 수많은 썩은 나뭇가지의 가시 파편들이 손가락에 박힌 것이었다.
환부를 누르자 피부 깊숙이 가시가 닿는 얼얼한 아픔이 증폭되어 왔다. 가시는 엄지에도, 검지에도, 그리고 약지와 새끼손가락까지 수십 군데에 박혀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가시가 박혀 본 적도 없었다. 아니, 가시 두 개 조차 박힌 적도 없었다.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빼지?’
일단 손톱깎이를 꺼내서 가시를 뽑아보려고 했지만 가시는 쉽게 잘 뽑히지 않았다. 이 정도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나는 보험조차 없는 외국인이었다. 병원을 간다 치더라도 엄청난 병원비가 나올 것이 뻔했다.
영원한 자전거 종주의 동료 구글에게 ‘손가락 가시 빼는 법’에 대해 물었다. 연고를 발라라, 물에 불려라, 테이프를 붙였다 떼라, 심지어 바나나 껍질로 문질러라… 세상에는 가시를 뺄 수 있는 별의별 방법들이 있었다. 바나나든 테이프든, 일단 숙소에 가서 가시를 처리해야 했다. 드롭바의 핸들을 잡을 때마다 피부 깊은 곳을 쿡쿡 찌르는 통증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가시를 뺀다고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아키타까지 야간라이딩을 해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북위 40도 간판을 지나 아키타 현을 가로질러 남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위도로 따지면 러시아를 벗어나 북한과 같은 위도였다. 위치상 동해안을 달리고 있었지만, 도로는 바다보다 좀 더 내륙 쪽이었기에 바다 대신 노랗게 익은 논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저 멀리 해안을 따라서 늘어진 풍차들이 작게 보였다. 내가 어제 상상했던 오늘의 라이딩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저곳에서 풍차들을 제치며 넓은 동해바다를 끼고 달리는 라이딩을 상상했는데… 하지만 다친 탓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안에는 아키타 시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멀리 돌아갈 여유는 없었다. 최단거리인 이 길로 달려야만 했다.
어느새 사방은 어둠에 휩싸였다. 달리면서 사진을 찍을 여유도, 풍경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숙소도 잡아두지 않았지만 무작정 아키타로 달렸다. 저녁 6시 반쯤 마침내 160킬로를 달려서 아키타 시내에 도착했다. 아이러니하게 다쳤던 이날, 여태까지 달려왔던 거리 중 가장 긴 거리를 달렸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주변 호텔의 숙박비가 모두 10,000엔 이상이었다. 결국 마지막 선택지였던 넷카페로 가기로 결정했다. 넷카페는 말 그대로 ‘Net Cafe’, 한국의 PC방 같은 개념이지만 만화책도 빌려볼 수 있고 심지어 야간에 숙박까지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넷카페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혹시나 외국인은 안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아무리 유튜브에서 일본 여행 유튜버들에게 넷카페가 소개되었다고 하지만, 내게는 미지와 베일의 장소라 불안감을 안고 향했다.
넷카페에 가던 길에 대형 드러그스토어가 보였다. 상처를 수습할 약과 밴드 등을 구입하며 가시를 빼기 위한 베이킹소다를 찾는데, 점원에게 ‘베이킨-구-소오-다’라고 일본어 억양을 사용해서 물어봤지만 점원은 그게 대체 뭐냐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하얀 가루인데… 청소나 야채 씻을 때도… 빵 만들 때….”
라고 어쭙잖은 일본어로 설명하자 점원이 알아차렸다는 듯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이거 맞으시죠?” “네! 맞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냉큼 베이킹소다를 집어 들어 장바구니에 넣었다(일본어로 베이킹소다는 쥬-소-(重ソウ)라고 한다).
넷카페 ‘카이카츠 클럽(Kaikatsu Club)’. 직역하자면 ‘쾌활클럽’이라는, 다소 이상야릇한 이름과 함께 주황색 간판이 보였다. 용기를 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비 한쪽에는 이용객들이 무료로 볼 수 있는 만화책들이 책장에 즐비해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무한리필 음료 가판대가 보였다.
넷카페는 시간 단위로 이용하는 시스템이다. 점원에게 오늘 12시간을 이용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알고 보니 시간을 미리 정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들어간 뒤에 나중에 나올 때 이용 시간만큼 요금이 정산되는 시스템이었다. 점원은 내게 넷카페 이용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넷카페 이용이 처음이시라면 회원가입을 하셔야 합니다.”
점원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게 회원가입 용지를 건넸다. 읽을 수 없는 한자 투성이의 회원가입 용지를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차저차 이름과 전화번호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적었지만, 일본 주소가 없었던 것이다.
“아, 저 외국인인데… 주소는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라고 묻자,
“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말하고는 점원은 작성한 회원가입 용지를 들고는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렸다. 차가웠던 점원의 첫인상이 떠올랐다. ‘외국인은 안됩니다’라는 대답을 가지고 올 것만 같은 예감에 불안했다. 넷카페가 안된다면 1만 엔이라도 내고 호텔에 가야 할 판이었다.
10여 분 뒤 점원이 다시 나타났다.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이 카드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점원은 내게 내 이름이 가타카나로 적혀 있는 회원증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점원에게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건넸다. 고작 넷카페 이용이지만, 뭔가 일본인들의 생활에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라 낮에 다친 상처의 쓰라림도 잊은 채 기분이 좋아졌다.
점원은 친절하게 나를 배정된 부스까지 안내해 주었다. 갈색 칸막이로 배치된 부스는, 제각각 안이 들여다 보이는 창을 가리기 위해 모두 담요를 문에 걸쳐두고 있었다. 희한하고도 낯선 풍경에 어스름한 불안감과, 첫 넷카페 경험이라는 작은 기대감과 함께 점원을 졸졸 뒤따라갔다.
작은 부스는 정말 성인 한 사람이 몸만 뉘일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고 좌식 책상,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있었다. 들고 있던 갖가지 자전거 짐들을 토해내듯 부스에 쏟아냈다. 그제야 오늘 라이딩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제일 먼저 세면도구와 수건을 들고 샤워를 하러 갔다. 샤워를 하기 위해 상처에 붙였던 밴드들을 다 떼어 냈다. 입고 있던 져지와 빕숏을 벗고 쓰라렸던 허벅지 뒤편을 보자, 손바닥만 하게 쓸린 상처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쓸렸다는 표현보다 ‘갈렸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상처였다.
땀에 젖은 옷들을 코인세탁기에 채우고, 배를 채우기 위해 근처에 있던 규동 체인점인 ‘스키야’에 갔다. 여행 때는 몰랐는데, 일본의 흔한 주택가의 밤거리는 정말 어둡다. 다들 퇴근 후에는 꼭 절대 외출하면 안 되는 단속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국에 비해 턱없이 가로등이 부족한 느낌이고 CCTV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부스로 돌아와 공용 담요를 깔고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상처엔 약을 바르고 사 왔던 밴드를 붙였다. 이제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왔다. 아까 사 왔던 베이킹 소다를 컵에 부은 뒤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물과 섞었다. 손을 담가놓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함께 사 온 밴드를 베이킹 소다 물에 적시고, 가시가 보이는 손가락 모두 덕지덕지 밴드를 붙였다.
좁디좁은 작은 부스에 지친 몸을 뉘었다. 꼭 맹수의 습격을 받아 상처투성이가 된 초식동물처럼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잠이 솔솔 밀려왔다. 시간은 이른 오후 9시였지만 어차피 컴퓨터도 키보드도 일본어인 넷카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다음 날 눈을 뜨면 팔다리의 통증은 가라앉아 있기를, 손가락에 박힌 가시 파편들이 불어 밀려 나와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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