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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Feb 12. 2024

비 내리는 히로사키

일본종주 9.5일차 : 잠시 히로사키에서의 일본살이



  다음날 히로사키에는 예보대로 비가 내리는 듯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서 걸어 나온 아침의 게스트하우스는, 드리운 구름과 함께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우중충하고 유독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날씨뿐만이 아니라, 관광지로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작은 도시의 작은 호스텔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것 같았다. 히로사키의 인구는 33만 명이다. 비슷한 인구로 한국의 경상남도 진주나 충남 아산 정도의 도시에 머무르는 셈이었다.


썰렁한 호스텔 로비 한편의 주방에서 식비라도 아끼고자 어제 사 온 재료로 프렌치토스트를 구워 먹었다. 간간히 지나다니는 호스텔에 묵는 손님들은 대체로 관광보다는 일 등의 어떠한 연유로 머무르는 행색이었다. 혹은 일본 전국 철도여행을 하는 서양인들의 잠시 지나가는 도시인 것 같았다.


나는 우산을 챙겨서 글을 쓰러 어제 점찍어두었던 스타벅스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비는 예상외로 많이 내리지 않고 가랑비처럼 내리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오늘 자전거를 탔었어야 했나? 나는 히로사키라는 이 일본의 한 작은 도시 위의 하늘을 바라보며 ‘역시 자전거를 오늘 탈 걸 그랬어. 아키타까지 갈 걸…’이라는 후회막급한 심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여 분을 걸어 히로사키 성 앞의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항상 마시는 카페라떼와 함께 아오모리 사과로 만들었다는 애플파이 메뉴를 주문했다.(사실 알고 보니 아오모리현뿐만 아니라 전국 스타벅스에 파는 것이었다) 미닫이창을 통해 건물 뒤뜰의 작고 푸른 일본식 정원이 보이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긴 책상 자리에 착석한 후, 주문한 애플파이를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고는 가방 대신 비닐봉지에 들고 온 태블릿을 꺼냈다. 지난 홋카이도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휴대폰에서 태블릿으로 옮겨가며 여행기를 정리했다. 글을 쓰다가 잠시 뻐근한 고개를 돌리니, 정원은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아까 전보다 채도가 낮아진 느낌이었다. 입구로 들어오는 새로운 손님들이 쓰고 온 우산을 탈탈 털고 있었다. 아까보다 비가 꽤 오는 건가? 얼마나 오는 거지? 하고 정문으로 잠시 나가 보았는데, 깜짝 놀랐다. 정말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엄청난 폭우가 도로 아스팔트 위를 두들기고 퍼부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와, 오늘 라이딩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구나….’


오늘 라이딩을 쉬어가며 히로사키에 머무르는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나는 다시 이 폭풍 속 고요한 스타벅스 점내의 내 태블릿이 놓인 좌석으로 조용히 돌아와 앉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비가 왜 이렇게 내리지 않냐고 불만이 가득했는데… 아침에 카페로 걸어오면서, 오늘 라이딩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으로 가득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자칫 라이딩을 출발했었더라면, 이 정도의 비는 견디고 탈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멈췄어야 하는 정도였다.


퍼붓던 히로사키에서의 비

퍼붓던 비는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저녁이 되자 하나둘씩 손님이 늘어났다. 정원이 비치던 미닫이창에는 금세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로 인해 햇빛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카페 내부는 노란 조명으로 아늑한 전구색 빛이 감돌았다.


앉아있는 동안 몇 명이 교체되어 앉기를 반복하던 긴 테이블의 빈자리에는 소위 JK, 일본 여고생들이 삼삼오오 학교를 마치고 온 건지 교복을 입고 와서는 앉았다. 그러더니 그녀들이 가방에서 꺼냈던 것은, 바로 문제집이었다. 그리고는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흘긋 교과서를 눈여겨보니 한 명은 과학을 공부하는 것 같았고, 한 명은 미적분 문제를 풀고 있었다. 일본 고등학생도 미적분을 하는 군… 한국처럼 일본에도 카공이라는 문화가 있구나.



이 날도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이토요카도 마트에 들렀다. 오늘은 어떤 품목이 50% 세일을 하고 있을지 기대를 잔뜩 안고 행복한 쇼핑을 하러 마트로 향한다. 108엔 소금빵이 40% 할인을 하고 있어 냉큼 집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엔저까지 생각하면 소금빵이 거의 500원이다. 한국에서는 소금빵이 3500원인데… 한국 소금빵은 금이 들어가기라도 하는 걸까?


널찍한 도미토리 룸의 내 자리는 거의 살림을 차린 듯이 물건들을 펼쳐 놓고 있었다. 그렇게 카페와 마트를 전전하며 히로사키에서 이틀을 보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착한 수요일에는 당연히 머물러야만 했고, 그렇게 오래 머무른 것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는 것에 안달이 났던 것일까?


관광지가 아닌 도시다 보니 이곳저곳 보러 가야 할 곳이 없어서 오히려 여유롭게 일본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과의 에피소드, 뜻하지 않은 인연과의 만남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ㅡ나름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ㅡ히로사키에서의 3일은 강렬하지는 않지만 분명 다른 도시들보다 또렷이 나의 기억 속에 지금도 남아있다. 다시 한번 여유롭게 가보고 싶은 히로사키. 그 순간순간의 여유를 즐길 수 없었던 것은 나만 손해였다. 왜냐하면 내일부터 다시 100km 강행군의, 지옥의 동해안 라이딩이 시작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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