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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Feb 08. 2024

일본 마트가 최고다

일본종주 9일차 : 아오모리~히로사키

  아오모리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항상 호텔 창문의 커튼을 활짝 열고 잠을 자는데, 아침햇살과 함께 반강제적으로 눈을 뜰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내일부터 연속 3일간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씨는 화창하고 맑았다. 10월의 한가을로 접어들자 하늘도 농도를 더 짙게 높인 파란색으로 완연해져가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오늘도 기분 좋게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거리도 40km만 달리면 된다. 그래서 아침에도 쫓기듯 나오지 않고 여유롭게 체크아웃을 하고, 자전거도 여유롭게 타면서 아오모리 시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항상 시간에 쫓기고 시간 걱정에 밥을 먹어도 급하게 먹고, 어느 곳 하나를 들러도 제대로 감상조차 못했던 것 같다. 여유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니. 종주가 끝난 이후에 인생을 살아갈 때에도 이런 여유가 가장 내게 필요하지 않을까...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푸른 잔디밭 위에 새하얀 벽체로 된 ㄱ자 형태의 미술관은, 뭔가 프로그램이라던지에서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으로 소개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실제로 검색해 보니 아오키 준이라는 정말 유명한 일본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오늘만큼은 시간 걱정 없이 푸른 잔디밭을 노닐듯 밟으며 미술관으로 걸어갔다. 


다만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 이해하기가 어렵듯 미술관 내부도 꽤 복잡하고 어려웠다. 이런 걸 시퀀스라고 하나? 어쨌든 이곳에는 유명한 개가 있는데, 사실 살아있는 개는 아니고, <아오모리 켄(아오모리 개)>라는 미술 작품이다. 가만히 서 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미술관 여성 직원에게 일본어로 “아오모리 켄은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나요?”라고 묻자, 직원은 이리저리 가는 방향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오모리 켄으로 가는 길은 매우, 아주 복잡했다. 아오모리 켄은 전시 표를 구입하지 않아도 무료로 볼 수 있는 작품인데, 대신 이 때문에 전시를 볼 수 없도록 미술관 내부를 통과하지 못하고 빙빙 둘러서 가게끔 동선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었다. 미술관 바깥으로 나갔다가, 계단을 몇 번씩 오르고 내려가고 난리도 아니었다. 돈 아끼려는 여행자의 설움이란.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의 아오모리 켄

미로같이 길고 복잡한 통로를 드디어 통과한 끝에 아오모리 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매우 크다. 사람 키의 4배는 될 법한, 거대한 스누피 같은 순진한 얼굴을 한 흰색 강아지 동상이 3면의 높은 콘크리트벽에 둘러싸인 모습은 '나는 대단한 작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술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기억도 나지 않는 학교의 서양미술사 교양 수업에서 배운 것이 전부인 나는 도대체 이 개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커다란 크기라는 것 하나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일단 무슨 의미가 있던 없든 간에, 배경지식이라는 색안경을 쓰지 않고 작품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경이로움 혹은 감정의 변화. 나는 그것이 작품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중시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작품을 만드는 수업에서도 나는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을까?'라고 골몰하기보다는 일단은 ‘보자마자 놀라게 만들자’,라는 생각으로 내 작품을 만들곤 했다. 


여하튼 나의 TMI는 접어두고, 파란 하늘 아래에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는 아오모리 개를 나 역시 조용히 바라보다가 슬슬 걸음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또 복잡한 통로를 거치고 거쳐서야 겨우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오모리 외곽에 있던 미술관을 마지막으로 이제 국도를 타고 히로사키로 갈 일만 남았다. 



대체로 홋카이도에서는 바다를 끼고 달렸다면, 이제 혼슈에서는 당분간 동해안의 아키타라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륙을 달려야 했다. 히로사키로 가던 국도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명절 때 친척집을 향할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흔한 숲이 쌩쌩 지나가는 그 풍경 그 자체였다. 차량이 달리는 방향이 다른 것을 제외하고는 일본이라고 다른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7번 국도로 직진하면 그대로 히로사키에 도착하게 된다. 나는 잠깐 7번 국도에서 빠져나와서, 일반 도로를 밟아 히로사키 바로 옆에 위치한 <구로이시>라는 도시로 향했다. 구로이시에서는 끝도 없는 논밭이 펼쳐졌다. 지금 가고 있는 곳도 논밭과 관련이 있었다. 라이딩을 하며 논밭의 풍경보다는, 국도보다 지나다니는 차가 거의 없어 마음껏 도로를 누빌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가끔 까마귀들이 도로 위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내가 탄 자전거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푸다닥거리며 먼 논으로 달아나고는 했다.


사과나무들을 키우고 있는 과수원도 자주 보였다. 아직은 철이 아닌지 사과들이 꼭 복숭아처럼 노르스름하거나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성인 이후로 목이 붓는 사과 알레르기가 생겨서, 아오모리 현의 명물을 생으로 먹어볼 수 없는 것은 유감이었지만… 그렇게 구글맵을 보면서 달리다가 찾고 있던 탑처럼 생긴 전망대 하나가 눈밭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착해서 입장료를 300엔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 위로 올라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유명한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의 모습이 논밭에 그려져 있었다. ‘논아트’라는, 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이곳은 매년 그림을 바꾸어 가면서 사람들이 보러 올 관광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리뷰를 살펴보니 모나리자, 아톰, 고질라, 울트라맨, 일본 농부의 모습 등 수많은 논아트가 있었다. 과연, 논아트로 유명할 만하다! 하고 왔더니 실상은… 사실 나는 그런 여러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매년 단 한 작품만 논에 그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본 리뷰는 모두 작년, 재작년, 그 이전 연도의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전망대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길에 벽에 전년도의 작품들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음, 300엔도 조금 아까웠고, 내가 이 루피 하나를 보기 위해 여기 먼 도시까지 왔다는 것도 조금 아까운… 어쨌든 논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정말 별의별 걸로 돈을 다 버는구나,라는 것이었다.


미술관도 들르고 논아트를 구경하고서도, 오후 2시라는 이른 시간에 히로사키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도시지만 기왕 이미 3일 동안 머물러야 하는 곳이었기에 아무 정이라도 붙여야 했다. “히로사키에는 뭐가 유명하지?”라고 일본인 친구에게 연락해 물어보니 ‘검색해 보니 쓰가루 소바가 유명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점심으로 쓰가루 소바를 판다는 가게에 도착했다. 사실 쓰가루 소바는 소바의 종류가 아니라, 그냥 히로사키 근처의 쓰가루라는 지방의 소바를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꼭 정계 사람들이 드나들 것만 같은 퍽 고색창연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가게가 1913년에 창업했다고 한다. 나는 가장 비싼 1800엔짜리 소바를 주문했다. 리뷰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텐자루 소바였는데, 텐자루 소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늘 천 한자와 소바라는 히라가나 단 두 글자뿐이었다. 도대체 하늘과 관련해서 무슨 종류의 소바가 나올지는 알지도 못하고 주문했다. 


히로사키의 소파 전문점 <타카사고>의 텐자루 소바

일반적인 소바와 새우튀김 두 개가 나왔다. 새우튀김 두 개에 1800엔이라니. 좀 많이 비싸군, 이라고 생각하며 새우튀김을 한 입 가져다가 베어 물자, 알고 보니 튀김 하나가 새우 두 마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었던 것은 예전 교토 여행에서 100엔짜리 소바를 먹어보기도 했었는데, 같은 소바임에도 불구하고 왜 어느 곳은 100엔이고 어느 곳은 1800엔이지?라는 생각이었다. 소바는 서민 음식인 걸까, 고급 요리인 걸까… 알고 보니 소바 면에도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면의 색깔이 흴수록 메밀껍질이 덜 들어간 것이라 등급이 높다고 한다. 메밀 풍미가 강해지는 대신 면이 잘 끊어진다고 한다.


소바를 먹고 나왔을 때에도 대낮에 가까운 날씨라, 체크인을 서두르지 않고 히로사키 성으로 향했다. 성곽을 둘러싼 공원에는 관광객보다는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하길래 그냥 공원만 유유히 걷다가 나왔다. 히로사키 성 옆에는 스타벅스 히로사키점이 있는데, 국가 문화재 건물에 스타벅스 점포가 운영되는 일본의 스타벅스 컨셉스토어로도 유명한 곳이다. 어차피 히로사키에 3일이나 있을 건데, 굳이 지금 급하게 들를 필요 없이 내일 오자고 생각하고 외관만 보다가 지나갔다. 예약했던 ‘히로사키 호스텔’을 ‘히로사키 호텔’로 착각하고 검색해서 갔다가 “예약이 없는데요?”라며 한참을 로비에서 직원과 씨름하던 해프닝이 있었다. 


히로사키의 스타벅스 컨셉스토어 

체크인 후 40km밖에 달리지 않았지만 샤워를 했다. 침대에 누워서 내일의 날씨를 다시 검색했다. 비가 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여태까지 어느 정도 비가 오는지 강수량을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강수량은 내일 목요일에 총 13mm라고 나와 있었다. 13mm? 강수량에 대한 감이 전혀 없어 다시 구글에 비슷한 양으로 ‘10mm 강수량’을 검색했다. 10mm 강수량에 관한 질문은 모두 시간당 10mm였지,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하루 총강수량이 10mm를 언급하는 질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10mm라는 강수량은, 정말 작은 강수량이었다. 시간당 2mm도 채 오지 않는데 나는 날씨만 보고서는 비 예보가 있으니 자전거를 타지 말자,라고 결정하고는, 덜컥 이 볼 것도 없는 작은 도시의 호스텔에 3일씩이나 연박을 예약해 버린 것이었다….


무지한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혹은 그깟 비 하나에 겁을 먹었던 나 자신에게. 내일 그냥 출발하고 싶었지만 예약 취소를 할 수도 없었기에, 내일 아키타로 가게 되면 이틀 숙박비인 7만 원을 날리는 셈이었다. 게다가 아키타에 마땅히 싼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이 보이지 않았다. 강수량이 적긴 했지만, 비가 오는 건 오는 것이니 밖에서 캠핑을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넷카페는 아직 가본 적이 없어서 목적지로 정하기에 조금 두려웠다. 나는 아키타의 강수량을 알아보았다. 아키타의 5일(목) 강수량은 총 50m로, 히로사키보다는 꽤 많은 양이었다. 히로사키에서 아키타로 내려갈수록 비가 거세진다는 뜻인가? 게다가 금요일에는 아예 아키타도 히로사키도 강수량이 거의 없었다. 목금을 여기서 보내고 토요일에 출발하는 것보다는, 내일만 히로사키에서 쉬고 금요일에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생각만 했지 결정을 하진 못했다. 나는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마지막까지도 결정을 하지 못하거나, 혹은 결정을 했어도 수차례 번복을 하는 습성이 있었다(MBTI에 이런 특성을 체크하는 항목이 있던 기억이 있는데…). 어쨌든 강수량까지 다음부턴 잘 체크해야지. 그깟 비 하나 때문에 하루 도시에 머무르면 식비와 숙박비가 최소 5만 원은 깨지니까 말이다.




그로 인해 저녁을 최대한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본 히로사키의 유명한 라멘 맛집도 포기하고, 뭘 먹을지를 고민하다가... 다행히 숙소 근처에 마트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누군가에게 일본 마트는 저녁에 세일을 해서 싸고 맛있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긴 들었지만, 나는 아직 일본 여행 중 마트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토 요카도(Ito Yokado)'라는 다소 특이한 이름의 마트는, 한국의 흔한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마트처럼 쇼핑몰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져 있었다. 저녁 시간의 일본의 대형마트에는 많은 한 가정의 주부인 듯한 여성들이 이리저리 가격표를 보면서 저녁에 해 먹을 음식을 쇼핑하고 있었다. 한국과 비슷한 풍경이지만서도 뭔가 실제 현지인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 있다는 느낌이 낯설고 신기했다. 그 사이를 걸으니 마치 내가 일본에 지금 살고 있는 현지인인 것 것만 같아서 꼭 어린아이처럼 들뜨고 신이 났다. 


반찬 코너, 스시 코너, 정육 코너, 도시락 코너 등… 다양한 코너를 둘러보며 오늘 저녁으로 뭘 먹을지 살펴보니, 수많은 제품에 빨간 세일 딱지가 가격표 위를 덮고 있었다. 20%, 30%, 40%, 심지어 50%까지! 상상 이상으로 많은 제품들이 할인을 하고 있었다. 의외로 기본 가격조차 한국보다 저렴했다. 한국에서 10000원엔 팔 것 같은 12피스 스시 세트가 원가는 600엔, 거기다가 40% 할인까지 붙어서 360엔에 팔고 있었다. 눈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대체 일본여행을 가면 편의점을 털어야 한다고 누가 말한 것인가? 일본 여행 몇 번 정도로 일본 여행을 낱낱이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거나, 로손과 패밀리마트, 세븐일레븐이 만들어낸 마케팅임이 틀림없다. 진짜 값싸고 맛난 음식들은 모두 일본의 마트에 모여 있었다. 행복이 여기 마트에 있었다. 누군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본 마트를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글을 썼다가 일본 마트가 한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일이 생기진 않겠지?



그래도 최대한 자제력을 잃지 않고, 오늘 먹을 음식으로 햇반에 구워 먹을 연어와, 며칠 동안 몇 끼를 때울 요량으로 산 프렌치토스트를 만들 식빵과 우유, 그리고 계란을 샀다. 강수량을 보며 자책하고 괴로웠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나는 즐겁게 장을 담은 봉투를 들고 호스텔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니 3일이 아니라 일주일이라도 히로사키에 눌러살고 싶은 마음이다. 내일은 뭘 할까? 오늘 낮에 들렀던 스타벅스에 가서 요즘 말마따나 디지털노마드처럼 쓰지 못한 홋카이도에서의 여행기나 몰아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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