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9.5일차 : 잠시 히로사키에서의 일본살이
다음날 히로사키에는 예보대로 비가 내리는 듯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 먼저 날씨를 확인하러 나왔다.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과 함께, 비 오기 전 특유의 습한 기운이 게스트하우스 로비에 감돌았다. 관광지로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작은 도시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것 같았다. 가끔 마주치는 같은 관광객으로 보이는 숙박객들마저 조용하다 못해 침울해 보였다.
썰렁한 게스트하우스 로비 한편의 주방에서 식비를 아끼려 어제 사 온 재료들로 프렌치토스트를 구워 먹었다. 이후 우산을 챙겨서 글을 쓰러 어제 점찍어두었던 스타벅스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비는 예상외로 가랑비처럼 내리는 둥 마는 둥 했다. 오늘 자전거를 탔었어야 했나? 하늘은 넓고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이 도시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역시 자전거를 오늘 탈 걸 그랬어. 아키타까지 갈 걸….’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후회만 되풀이하며 걸었다. 20여 분을 걸어 히로사키 성 앞의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일본의 국가 문화재 건물이 카페로 운영되는, 전국의 스타벅스 컨셉스토어 중에서도 유명한 곳이었다. 항상 마시는 카페라떼와 함께 아오모리 사과로 만들었다는 애플파이 메뉴를 주문했다(알고 보니 아오모리 현뿐만 아니라 전국 스타벅스에 파는 것이었다).
미닫이창 너머로 건물 뒤뜰의 작고 푸른 일본식 정원이 보이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긴 책상 자리에 착석한 후, 주문한 애플파이를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고는 가방 대신 대롱대롱 비닐봉지에 들고 온 태블릿을 꺼냈다. 홋카이도에서 자전거를 타며 찍었던 사진들을 휴대폰에서 태블릿으로 옮겨가며 여행기를 정리했다. 글을 쓰다가 잠시 목이 뻐근해 고개를 돌리자, 입구로 들어오는 새로운 손님들이 쓰고 온 우산을 탈탈 털어대고 있었다. 아까보다 비가 꽤 오는 건가? 정문으로 살짝 나가보자 깜짝 놀랐다.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엄청난 폭우가 도로 아스팔트 위를 두들기고 퍼부어 내리고 있었다.
‘와, 오늘 라이딩했으면 진짜 골로 갈 뻔했구나….’
자칫 라이딩을 출발했었더라면 이 정도의 비는 견디고 탈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멈췄어야 하는 정도였다. 히로사키에 머무르는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비가 왜 이렇게 내리지 않냐고 불만이 가득했다. 오늘 라이딩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로 자책하던 아까 전 내 모습이 심히 부끄러워졌다.
저녁이 되자 퍼붓던 비가 잦아들었다. 정원이 비치는 미닫이창에는 금세 어둠이 드리워지고, 저녁이 되어갈수록 카페 내부의 아늑한 전구색 빛이 도드러져만 갔다. 저녁이 되자 학교를 마치고 온 JK, 교복을 입은 일본 여고생들이 삼삼오오 나타나서 나의 옆 좌석에 앉았다. 여고생들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문제집이었다. 각자 펜을 잡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슬쩍 교과서를 보니 한 명은 과학, 다른 한 명은 미적분 문제를 풀고 있었다. 한국처럼 일본에도 ‘카공’이라는 문화가 있다니 참 신기했다.
돌아오는 길에 오늘도 마트에 들렀다. 오늘은 어떤 품목이 50% 세일을 하고 있을지, 잔뜩 기대를 안고 부푼 마음으로 마트로 향했다. 108엔 소금빵이 40% 할인을 하고 있어 냉큼 집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엔저까지 생각하면 소금빵이 500원이다. 한국에서는 소금빵이 기본 3,000원인데….
널찍한 도미토리의 내 자리는 거의 이곳에서 살림을 차린 듯 너저분하게 소지품들이 펼쳐져 있었다. 관광지가 아닌 도시다 보니 이곳저곳 보러 가야 할 곳이 없어서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일본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일상을 가까운 거리에서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착한 수요일에는 당연히 머물러야만 했고, 그렇게 오래 머무른 것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여유를 갖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는 것에 안달이 났을까? 어떤 사람과의 에피소드, 뜻하지 않은 인연과의 만남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ㅡ나름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ㅡ히로사키에서의 3일은, 강렬하진 않지만 분명 어떤 다른 도시들보다도 또렷이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히로사키. 내 인생에 다시 여유가 찾아온다면, 나는 또다시 히로사키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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