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32일차 : 후쿠오카~구루메
전역 후 일주일 만에 자전거와 함께 일본의 최북단으로 날아왔던 9월 22일, 그리고 45일이 흐른 지금 날짜는 11월 5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45일 동안 총 3200km 정도의 거리를 달렸다. 이제 후쿠오카에서 일본의 최남단까지 거리는 약 400km 남짓이 남아 있었다.
3200km를 탔는데도 400km는 여전히 너무 길어 보였다. 하루 평균 100km를 간다고 계산하면, 지금부터 4일이면 목표로 하는 최남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100km씩 갈 수는 없다. 100km마다 항상 도시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지나가는 루트 중에 싼 숙소가 위치한 도시를 먼저 찾은 뒤, 적절하게 어디에서 내가 머무를지를 정해 적당한 라이딩 거리를 계산해야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구루메라는 도시였는데, 후쿠오카에서 50km밖에 되지 않는 곳이다. 왜냐하면 다음 날 비 예보가 있어서 자전거를 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오늘 100km를 타지 못하더라도 남은 50km를 적절히 남은 날짜들에 배분하면 되니까. (결국 내일의 내가 고생해야 할...)
유달리 혼슈에서 큐슈로 넘어오자 햇빛이 따가운 느낌이었다. 11월인데도 마치 여름인 것처럼 햇빛이 살갗을 내리쬐었다. 남쪽이라서 그런가? 오늘 낮 최고 기온이 무려 27도여서 깜짝 놀랐다. 한국은 과장 보태서 이제 패딩을 꺼내서 입고 다닐 날씨일 텐데 말이다.
후쿠오카의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다자이후라는 관광지가 있다고 해서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다자이후 근처로 향하면 향할수록 점점 거리에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 근처의 자전거 주차장에 자전거를 대충 세워두고는 항상 그랬듯 쫄쫄이 차림으로 당당히 다자이후 거리로 걸어갔다. 이젠 별 아무런 쪽팔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말이라 그런지 역시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정말 다자이후는 ‘관광지’라는 세 글자 말고는 대체로 알고 온 정보가 없었는데, 천만궁이 유명하다고 한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빨간 아이스크림처럼 생긴 무언가를 들고 먹고 있는데, ‘아마오우’라는 딸기 특산물로 만든 아이스바라고 한다. 후쿠오카 현의 명물인 아마오우 딸기는 일본 전국에서도 당도와 크기에 있어서 고급으로 취급받는 유명한 딸기라고 한다. 500엔의 거금을 치르고 나도 다른 관광객들을 따라 하듯 아이스바를 하나 손에 쥐고선 먹었다. 음… 그냥 딸기가 들어간 젤리바였다. 아마오우 딸기를 맛보려면 직접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 먹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천만궁으로 가는 거리에는 유독 특이한 디자인의 스타벅스가 하나 있는데, 일본의 건축가 ‘쿠마 겐고’가 설계한 스타벅스로 유명한 곳이다. 쿠마 겐고의 작품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터라 관련 전공생으로서도 꽤 기대를 하고 갔는데, 가게 전체를 뒤덮은 목조 구조물 이외에 예상보다 가게 내부는 굉장히 평범해서 김이 샜다.
천만궁 입구에 도착하자, 웬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이 있길래 정말 왜 서 있는지도 모른 채 줄 끝으로 가서 뒤따라 줄을 섰다. 누워있는 한 황소 동상에서 사람들이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바로 뒤에 선 두 일본인 여성에게 “저 황소가 대체 뭔가요?”라고 물어보았다. 황소가 뭔지도 모른 채 줄을 서 있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아 보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근데 두 여성도 당황하더니 “음, 뭐지? 뭐더라? 저희도 사실 잘 몰라요.”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휴대폰으로 검색하고는,
“황소의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좋아지고 공부를 잘할 수 있대요.”
라고 내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하구나, 일본에도 센터 시험(일본의 대입 시험) 전에 학부모가 학생의 손을 잡고선 이곳에 몰려올 것만 같다는 상상을 했다.
다행히 두 여성과 말을 튼 덕분에 자연스럽게 황소와 함께 서로의 인증샷을 찍어주기도 했다. 사실 준비하고 있는 시험도 없는데 굳이 왜 황소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년 복학 후 학점을 딸 때까지 이 효력이 남아있기를 빌면서.
천만궁(텐만구)는 신이 아닌 일본의 한 학자를 받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 신을 모시는 곳은 신궁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주로 학업, 시험에 대한 행운을 빌기 위해 이곳을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동안 많은 신궁, 신사들을 돌아다녔지만 여기만큼은 조금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특히 다른 신사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얗고 빨간 하카마의 무녀복을 입은 여성들이 자주 보였다).
경내로 들어가자 수많은 인파가 가득 메워져 있었는데, 뭔가 안에서 행사를 치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일본 전통 결혼식인 것 같았다. 이윽고 신랑과 신부가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천만궁에 온 관광객들이 함께 결혼을 축하하며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얼마나 이곳에서 결혼식이 자주 열리는지는 모르겠지만-모두가 결혼식을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니겠지만-딱 다자이후에 왔던 이 날에 일본 사람들의 특별한 생활상까지 볼 수 있어서 기뻤다. 항상 시간과 거리에 쫓겨서 서두르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자, 하고 자전거를 타자 행운이 나를 따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느긋하게 천만궁을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가까워서인지 구루메에는 오후 2시 30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와버린 탓에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서 호텔의 로비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역시나 오후 4시에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점원이 딱 잘라서 이야기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음에도 점원의 입냄새가 심했다. 오늘도 자전거를 어디에 둘 수 있냐고 묻자, 건물 내부는 안 된다면서 주변 주차장을 찾으라는 점원의 말에 조금 기분이 상한 채로 앉아 있었다.
칼같이 정확히 4시가 되자 점원이 체크인을 안내해 주었다. 그때 갑자기 점원이 아까 내가 말했던 자전거 주차가 마음에 걸렸었는지, “음, 그럼 여기 두시겠어요?”라고 말을 걸더니 1층에 있는 비상용 계단 쪽의 공간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비상용 계단이니 항상 직원만 열 수 있으므로 자전거를 타고 나갈 때만 직원에게 이야기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상해있었는데, 너무 감사해서 순식간에 호감도가 상승했다.
공용 욕실이 있는 싱글룸을 예약했는데, 싱글룸 치고 왜 이렇게 가격이 저렴한가 했더니 밀폐된 공간이 아니고 문이 접이식으로 되어 있고 머리 위쪽이 뻥 뚫려 있었다. 아니, 이럴 거면 대체 방 안에 TV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TV를 켜면 층 공간 전체에 TV소리가 울려 퍼질 것만 같이 방음이 불가능한 구조인데 말이다.
거리를 확 줄여버리니 샤워도 여유롭게, 침대 위에서도 저녁을 무얼 먹을지 고민하며 여유롭게 휴식을 만끽했다. 어제 후쿠오카에서도 하루 1박을 쉬었지만, 그때는 후쿠오카라는 도시였기에 쉬었을 뿐이지, 사실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발과 다리 입장에서는 휴식보단 라이딩 대신 다른 운동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곳 구루메에서는 딱히 할 게 없었다. 비가 오는 내일 전철을 타고 주변에 가보고 싶었던 도시를 둘러볼 생각이었으니 구루메에서 잠시 멈추었을 뿐이었으니까. 이게 바로 진정한 휴일이지 싶었다.
반팔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푹푹 찌던 더위의 낮과 다르게 밤바람만큼은 11월이라고 주장하듯 꽤나 쌀쌀했다. 숙소 근처에 있다는 돈코츠 라멘으로 유명한 라멘 가게로 걸어갔다. 사실 규슈나 후쿠오카 하면 돈코츠 라멘을 많이 떠올리지만, 정확히 돈코츠 라멘의 원조는 바로 이곳 구루메라는 도시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라멘의 맛은 너무 기대를 한 탓이어서 그런지, 그냥 쏘-쏘하다고만 느껴졌다. 맛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너무 일반적이고 평범한 맛있는 돈코츠 라멘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어제 후쿠오카에서 먹었던 <겐키 잇빠이>의 정말 곰국처럼 진한 국물의 돈코츠 라멘이 더 기억에 남았다.
라멘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하루에 평균 100km를 타는 자전거인에게 라멘 한 그릇으로 위장이 만족할 리가 없었다. 배고파서 지나가던 길에 보이는 아무 야키니쿠 가게에 들어갔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야키니쿠가 더 맛있었다. 생각해 보니 일본에 50일 동안 있던 동안에 야키니쿠를 오늘 처음 먹었다. 야키니쿠 가게임에도 특이하게 1인석도 있었다. 우설 한 접시와 호르몬 두 접시를 주문해서 배부르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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