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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May 20. 2024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일본종주 33일차 : 구루메~히토요시

  다행히도 어제 비로 흠뻑 젖었던 구루메의 거리는 밤 사이에 메말라 있었다. 나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빠르게 어제 미리 사두었던 샌드위치를 먹고서는 출발 준비를 했다. 


  오늘도 장거리를 달릴 예정이었기에, 무려 새벽 6시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체크아웃을 마쳤다. 여기 구루메에서 최남단 사타곶까지는 약 350km였다. 다음 목적지는 이곳에서 약 170km 떨어진 히토요시라는 도시로 결정했다. 200km를 가고 싶었지만, 히토요시에서 30km 반경 내에 머물 만한 숙소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히토요시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히토요시보다 더 가까운 숙소를 고르기에는 지금 남은 거리를 최대한 줄여야만 내일의, 그리고 모레의 내가 덜 고생할 수 있었다.



11월이라 그런지 해가 일찍 뜨는 일본이라고 해도 새벽 6시의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이렇게 어두운 새벽에 달린 적이 없었기에, 꼭 야간라이딩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저녁엔 퇴근하는 차들로 거리가 붐비지만 새벽엔 거리에 차가 거의 없어서 자유롭게 탈 수 있는 느낌이 좋았다. 


다리야 미안해

해질녘의 하늘이 금방 어두워지는 것처럼, 30분도 되지 않아서 하늘이 밝아져 있었다. 긴 여정에 앙상해진 채 두 페달을 밟는 다리를 보자 내 몸에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딱 이틀만 참아줘… 




구루메 시내를 벗어나서, 나가사키와 구마모토로 둘러싸인 아리아케 해를 따라서 줄지어진 작은 도시들을 차례차례로 통과했다. 딱히 눈에 띄거나 기억에 남을 만한 풍경은 없었지만, 며칠 전 시모노세키 이후로 다시 오랜만에 다시 해안선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한국 서해안에서만 봤던 갯벌 해안이 펼쳐졌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일본의 시골 풍경들을 유유히 응시하며 지나간다. 구마모토 현에 들어서자 귤밭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한국에서 귤 하면 제주도이듯, 일본에서 귤 하면 에히메가 가장 유명하지만 구마모토도 귤로 알아주는 곳 중 하나인 것 같았다(실제로 마트에서 구마모토 귤도 정말 자주 보이고, 에히메 귤보다 구마모토 귤이 사 먹어보니 훨씬 맛있었다).



거리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아 구마모토 시내는 가지 못했다. 결국 구마모토의 찾아둔 맛집은 가지 못하고 대신 결국 오늘도 가다가 보이던 패밀리 레스토랑인 사이제리야에 들어가 피자를 먹었다.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작은 피자 한판과 음료 무한 리필이 고작 500엔이라는 것은, 종주하는 라이더에게 이만한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가게가 따로 없었다. 일본 종주를 준비 중이라면 참고하길 바란다.



이제 겨우 오후 1시인데 벌써 120km가 찍혀 있는 어플을 보자 나 자신이 스스로 대견스러워졌다. 점심을 먹고서는 해안선 쪽을 벗어나 다시 내륙으로 다시 접어들었다. 이곳부터는 긴 강을 따라서 정말 지도에서 편의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외진 산간 도로를 자그마치 50km나 달려야만 하는데, 다행히 산간 도로이지만 신기하게도 대체로 오르막이 없는 평지였다.



국토종주의 문경새재가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산맥으로 둘러싸여있던 강은 신기하리만큼 에메랄드 색으로 윤슬과 함께 빛나고 있었고, 신기하리만큼 이 아름다운 강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은 전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곳 지반에 어떤 특별한 물질이 있어 강물과 섞여서 어떠한 원리에 의해 에메랄드 색으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꽤나 차는 빈번하게 지나다녔는데, 대부분 공사를 위한 흙을 싣고 있는 화물차들이었다. 강변 곳곳에서 많은 공사를 하고 있어 차량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가장 마지막으로 1차선을 통과하며 나를 기다려주는 일본 운전자들에게 신세를 졌다. 


구마 강에서 하고 있던 공사들

햇볕은 아직도 쨍쨍 내리쬐고, 나는 땀에 절은 버프 안에서 숨을 내쉬며 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도로를 계속 달리고 있었다. 공사하는 곳도 차량도 점점 사라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고, 30분을 달려도 차량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이국의 파란 하늘 아래 외진 도로를 홀로 라이딩해야만 했다. 종주 내내, 자주 듣던 노래의 한 가사가 오늘도 떠오른다. '異國の空見つめて孤獨を抱きしめた(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고독을 껴안았어)'


자유로웠지만 지루했다. 정지해 있는 듯한 같은 풍경을 두 시간 동안 바라보며 달려야만 한다. 노래도 1시간 이상 들으면 마치 과식을 한 것처럼 귀가 힘들어진다. 미리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두었던 30분 이상의 장편 유튜브를 라디오를 듣듯이 몇 편이나 들으면서 라이딩했는지 모르겠다. 유튜브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라이딩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고마워요 유튜브.




버스가 1일에 1대는 올까 싶은 허름한 버스 정류장에 앉아 숨을 돌리기도 하며, 꾸역꾸역 남은 거리를 보며 페달을 밟아나갔다. 머리 위의 파란 간판은 히토요시까지 남은 거리가 14km라고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14km… 평소 같았으면 ‘14km? 금방이네’라고 생각했겠지만, 156km를 밟은 지금 14km는 ‘아직까지 14km나 남았다고?’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거리였다. 나는 ‘물이 반이나 남았네’ 같은 긍정적 생각 따위는 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드디어 도착한 히토요시 시내

사실 글은 죽을 맛인 것처럼 썼지만, 막상 히토요시에 도착했을 때에도 꽤나 체력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해도 지지 않은 오후 4시 반에 숙소에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이럴 거였으면 200km 오늘 달성할 수 있었는데.


숙소는 싱글 룸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이름은 호스텔인데 도미토리 룸이 없이 모두 싱글 룸으로 제공하고 있는 듯했다. 어제는 방음도 되지 않아 싱글룸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없는 호스텔 같은 호텔에서 잤는데, 오늘은 호텔 같은 호스텔에서 머물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루틴이 되어버린, 숙소에서 씻고 나와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을 사러 가는 나의 슬리퍼 차림의 발걸음. 가라아게와 치킨, 햇반과 에너지 드링크 등 이것저것을 샀다. 신기한 것은 히토요시의 마트에서 술을 사고 있던 50대 한국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시골 도시에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어제 보던 <모노노케 히메>를 마저 보았다. 아마자케를 난생처음 마셔봤는데, 막걸리도 식혜도 아닌 게 정말 애매모호한 맛이었다.



항상 내일 어디까지 갈지 루트를 짜는 것과 함께, 또 한 가지 루틴이라면 지루한 라이딩을 견디기 위해서 내일 어떤 유튜브 영상들을 들을지 다운로드할 영상들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다르게 보자면 힘든 여정에서 조그마한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내일이면 최남단까지 D-1이다. 오늘 170km를 달렸으니 많이 줄여서 남은 거리가 180km가 되었다. 마음 같아선 내일 최남단까지 180km라도 달려서 가고 싶었지만, 밤에 최남단에 도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일은 오르막길이 많아서 적당히 100km 거리 정도에 있던 저렴한 호텔을 목표로 하고 계획을 마쳤다. 한국에서는 새벽 2-3시에 자던 나도, 이곳에서는 오후 9시만 되어도 잠이 몰려온다. 최고의 수면제는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아닐까…



오늘 종주 중 가장 최장거리인 170km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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