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34일차 : 히토요시~다루미즈
아침 일찍 7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나왔다. 11월의 일본의 아침은 너무 추웠다. 아니, 최고기온은 22도인데 최저기온은 6도라니. 오히려 내내 한국처럼 춥다면 옷을 껴 입을 텐데, 아직도 일본은 환절기인가 보다. 10분 정도 벌벌 떨며 라이딩을 하다가, 추위를 참지 못하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곧장 들어가 핫팩을 구입했다. 팔과 등, 허벅지 등 붙일 수 있는 곳은 모두 덕지덕지 붙였지만 사실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히토요시의 아침은 안개가 자욱했다. 아마 어제까지 타고 올라왔던 강이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가서 그런 것 같았다. 코앞 이외에는 아무것도 시야에 보이지 않을 만큼 짙게 안개가 끼어 있었다. 사일런트 힐 같았다. 물론 이곳 주민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등교 중인 유치원생들도).
귀신같이 마을을 벗어나자 안개는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안개 대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시 첩첩산중으로 향하는 국도… 큐슈에 곰이 살지 않는다고 하니 다행히 한적한 도로에서도 마음을 놓고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어제 지도에서 길 찾기에서 본 것처럼 다소 업힐을 예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평소에 비해서 너무 체감상 버겁다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오르내리는 오르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고 오르막이 굉장히 오래 이어졌다. 입으로 육두문자를 몇 번이나 뱉었는지 모르겠다. 군마의 1000m도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제 170km나 자전거를 타서 그런 걸까?
정상 즈음에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자 정말 예상보다 꽤나 높이 올라왔다. 산맥들이 훤히 보일 정도로 꽤나 높이 올라오긴 했다.
큰 고비를 넘긴 후 길게 이어지는 내리막을 타고 내려와서, 살짝 방향을 틀어 ‘소기 폭포’라는 곳으로 향했다. 어제 주변에 들를 만한 관광지를 지도에서 찾아보다가, 우연히 보았던 곳이다. 어제 170km를 타는 동안은 정말 오로지 '라이딩'만 해서, 오늘은 그래도 어제보단 여유롭게 어디라도 보고 가자고 생각했다. 경로에서 3km 정도만 가서 왕복 6km면 보고 올 수 있는 곳이었다.
넓은 주차장과 함께 안내소인 듯한 건물과 주변의 식당들을 보니 벌써 도착한 것 같았다. 주차장 구석의 적당한 곳에 자전거를 세워서 메어두었다. 벌써 이곳에서부터 폭포에 쏟아지고 있을 거대한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뒤따라 폭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계단을 걸어 아래로 내려오자, 마치 얼굴에 미스트를 뿌리는 듯한 폭포에서 생기는 물보라가 공중을 떠다녔다. 드넓게 펼쳐진 검은 암석지대 위로 강물이 하얀 굉음을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소기폭포는 폭이 210m로 일본에서 가로로 가장 긴 폭포라고 하지만, 가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낙차 높이가 높아 보이진 않았다.
사실 이곳 소기 폭포의 리뷰에서 많이 보이던 ‘일본의 나이아가라, 동양의 나이아가라’라는 수식어를 보고 갔다가는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는 양상이었다(나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휴대폰에 폭포의 사진을 담고는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오늘도 갈 길이 멀었다. 자전거에 다시 올라타서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에, 나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여행객인 듯한 한 남자가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같은 동양인이라 하더라도 중국인,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은 멀리서 봐도 딱 확연히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뇌의 프로세스 중 1단계로 한국 사람을 인식하는 일, 그리고 2단계로 넘어가 그 사람이 ‘낯이 익다’라는 것을 판단하는, 메모리 처리 단계로 넘어간 것에 깜짝 놀랐다. 이런 외진 곳에서 2단계로 넘어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인 중 누군가와 닮은 사람일지도, 혹은 정말 지인이라는 두 가능성 사이에서 그를 좀 더 가까이서 보자,
“아니… 여기 왜 계십니까?”
그와 거의 2~3m 내로 가까워졌을 때 즈음, 나는 후자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정체 역시 깜짝 놀랄만한 정체였다. 그는 작년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내 소대의 소대장이었던 것이다.
“아니, 넌 대체 여기 왜 있는데?”
둘 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도쿄나 오사카 도심지면 모를까, 큐슈 한가운데 있는 이 외진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저 지금 전역하고 일본 종주를 하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왔냐고 묻자, 나는 일본 가장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대답했다. 사실 내가 군대를 늦게 갔기 때문에, 소대장보다 내가 4살이 많았다. 전역을 했기에 이미 사실 남과 다름없었지만, 군대 이후로 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와, 홋카이도에서부터 왔다고? 대단하네… 멋지다.”
소대장 역시 전역한 이후 여행을 다니면서, 이번에 가고시마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의 최북단 끝 강원도 고성에서 만났던 인연에서, 여기 일본 최남단 끝 부근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우리는 그렇게 짧은 악수와 간단한 대화와 함께, 빠르게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 갈 길로 헤어졌다.
사실 소대장과 나는 인연이 깊다면 깊다고 할 수 있었다… 좋지 않은 쪽으로 말이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이 있었고, 나는 다른 부대로 이동했다. 그렇기에 사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런 놀라운 우연에도 사진이라던지 식사라도 함께 하거나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테지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발길을 돌렸던 것 같다.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사진을 찍자고 할걸. 전역을 하면서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싫어하던 병사도 간부도, 그들을 향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역을 하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사람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가시를 세웠을까. 즐겁고 행복한 감정과 기억을 남기기에도 짧은 시간이었는데.
소기 폭포를 떠나면서 이번 만남을 계기로 너무 반가웠다, 이전엔 미안했었다,라고 메시지를 보낼까라는 고민을 머릿속에서 수십 번도 더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보내지 못했다. 순전한 나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다시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직 상대방은 나에 대한 감정이 풀리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그렇게 페달을 밟고 가던 도중, 옆에 쌩하고 흰색 차량 한 대가 지나가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대장의 목소리였다.
“잘 가! 파이팅!”
나는 멀어지는 차량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바보같이 그 뒤에도 메시지를 보내진 못했지만 말이다.
가고시마 공항을 지나 기리시마에 도착했다. 기리시마는 가고시마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이제 이곳의 해안선을 따라 쭉 가기만 하면, 최종 목적지인 일본의 최남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도로와, 바다 저 멀리에는 사쿠라지마 화산이 우뚝 서 있었다. 문득 처음 일본의 최북단에서 종주를 시작했었던 2개월 전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리시리 산이 보이는, 해안을 따라 오로론 라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치 출발점에서 시작했던 그때의 풍경과 종착점으로 향해가는 지금의 풍경이 겹쳐 보여서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시도 아니고 종주 코스가 수미상관이라니.
멀어 보이던 사쿠라지마 화산도 통과하고, 해가 저물어가던 때 즈음 최남단으로부터 70km 떨어진 지점의 한 호텔에서 오늘 라이딩을 멈추었다. 다루미즈라는 작은 동네의 <HOTEL AZ>라는, 저렴한 숙박비로 큐슈 여러 곳에서 체인으로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 미리 편의점에서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을 사 왔다. TV를 켜자 가고시마에는 또 멧돼지가 출현해서 문제라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큐슈에 곰이 없다더니, 곰이 없으니 다른 동물이 문제다. 어쨌든 아사히 맥주와 함께 돈가스 도시락을 먹으며 오늘도 고된 라이딩을 마무리했다. 호텔에 누워 있으면 항상 행복하다.
물론 바로 잠들기에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최남단인 사타곶까지는 70km이기에 최남단을 도착해도 다시 돌아오는 코스를 생각해야만 했다. 최남단 근처에 공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에 일단 숙소를 정해서 그쪽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고시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그냥 내일 가고시마까지 가서 며칠간 쉬고 싶었다. 하지만 가고시마까지는 육로로 돌아가려면 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더 걸릴 거리였다. 근처에 있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가고시마가 있는 반대편 쪽으로 바다를 건너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마지막 배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최남단에서 30km 부근 이부스키로 건너갈 수 있는 페리 터미널이 있길래 이부스키로 건너간 다음, 그곳에서 전철을 타고 가고시마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참 복잡하다. 최남단만 가면 이미 내 목표는 달성한 것이었기에, 자전거를 싣고 전철을 타든 비행기를 타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이제 이 긴 여정도 끝이구나, 정말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글자 자체로는 떠올랐지만 딱히 솟구쳐 오르는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3700km의 라이딩으로 만신창이가 된 지친 몸을 며칠간 뉘인 채,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는 또 어떻게 가지. 그건 또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할 문제겠지만... 저번에는 호기에 가고시마에서 다시 후쿠오카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젠 무조건 신칸센을 타거나 가고시마 공항에서 돌아간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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