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35일차 : 다루미즈~사타곶
드디어 일본 종주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두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날에도 밍기적대다가 6시에 일어났다. 최남단까지 남은 거리는 약 70km였지만 돌아오는 거리도 고려해야 했고, 상승 고도로 보아 꽤나 업힐이라는 난항이 마지막까지도 이어질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오늘만 참아,라고 달래보아도 오늘도 역시 쌓인 피로에 구석구석 신체 부위들이 모두 함께 중창단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호텔에서 아침 조식을 제공해 준다고 해서 먹으러 내려갔다. 호텔인데도 4700엔의 숙박비에 조식까지 포함이라니 꽤나 괜찮은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뷔페의 ‘무한 리필’이야말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종주 라이딩에서 최고의 요소였다. 오늘 최후의 라이딩을 위해서, 오히려 몸이 무거워져서 더 힘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밥이든 빵이든 배에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집어넣었다.
마지막 날이었지만, 아쉽게도 날씨는 꽤나 우중충했다. 그래서인지 해안선을 달리면서도 영 바다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구글 리뷰 수가 꽤나 많았던, 바닷가에 있던 한 신사의 붉은 토리이도 흐린 날씨 탓에 빛을 보지 못하고 황량하게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란색 도로 표지판에 ‘Cape Sata(사타곶)’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일본의 최남단이었다. 9월 22일에 출발하여, 오늘인 11월 9일까지 48일 동안 이곳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저기만 가면 끝이라니,
가는 곳마다 사타곶 안내가 표지판에 적혀 있었다. 뭐 관광지다 보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은 한 표지판을 보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40km 거리에서부터 사타곶을 안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으로 따지면 수원에서 ‘광화문까지 40km’라고 쓰여있는 격이니까. 뭐, 이 외진 곳까지 왔다면 일본 최남단으로 가는 것 말고는 다른 곳을 가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먼저 가는 길에 오늘 가고시마로 돌아갈 페리를 타야 하는 네지메 항에 들렀다. 구글 지도에 하도 속은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페리가 출발하는 시간을 확인하러 들렀다. 현재 시간은 9시 30분, 유리창에 붙어 있던 배 시간은 순서대로 11시, 14시 30분, 16시 30분… 여기서부터 사타곶이 36km이니까, 왕복 72km, 대충 80km로 잡으면 라이딩으로 4~5시간… 일단은 빠듯하게 14시 30분을 목표로 하고 다시 가던 길로 향했다.
40km 반경에서부터 거의 체감상 5km 단위로 사타곶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였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누굴 약 올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런 기분은 자동차가 아닌 사서 자전거로 고생해서 가는 나 혼자만 느끼는 기분이겠지만 말이다.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량도 거의 사라지고, 이제 지도에서 편의점이나 마을조차 보이지 않았다. 난항이 예상되는, 깊숙한 산 쪽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마치 사타곶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나를 반기고 있었다. 위도로 따지면 제주도보다 훨씬 낮은 곳이기에, 숲으로부터 아예 기후 자체가 뭔가 아열대 지역으로 온 것만 같은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업힐을 연이어 올랐다. 최남단이 코 앞인데도(사실 코앞이라고 하기엔 10~20km나 남아 있었다)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최고 상승 고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오르락 내리락이 너무 심한 낙타등 코스였다. 낙타등보다는 차라리 그냥 계속 올라가는 게 낫다(돌아가는 길에 다시 올라가야 하니까). 군마의 1000m 산을 올랐던 게 쉬웠다 싶을 정도였다. 몸이 완전히 지쳐버려서인 걸까, 중간에 에너지를 보충할 편의점조차 없는 곳에서 혈혈단신으로 라이딩을 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여태껏 겪었던 모든 일본의 코스 중에서도 체감상 가장 힘들었다.
길이 워낙 외져서인지, 종주 내내 본 적 없었던 로드킬을 당한 동물들이 길가에 자주 보였는데, 고양이도 있었고, 떡하니 ‘동물주의’라는 표지판과 함께 아이러니하게 바로 앞에 죽어있던 오소리인 듯한 동물도 있었다. 하지만 차도 없고 마을도 없어 마치 다른 세계에 나 홀로 떨어진 것만 같았다. 큐슈엔 곰이 없다는데 숲으로부터 느껴지는,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마치 꼭 정체불명의 동물이 튀어나와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게임 속 던전을 통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죽을 것만 같던 고통스러운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번이나 지났을까, 저 멀리에 관광지 입구로 보이는 듯한 커다란 조형물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끝났구나. 이제 저 입구로 들어가면 일본의 최남단이구나…
감흥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도 오늘 했던 고생에, 여태까지 했던 고생길에 감격의 눈물이 나올 것처럼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조형물에는 반가운 ‘일본 본토 최남단 사타미사키’라는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8km라고 쓰여 있었다. 아니, 8km? 꼭 여기를 통과하면 주차장도 나오고 인포메이션도 나오고 다 나올 것처럼 해놓았더니 아직도 8km라고?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스트레스가 치솟는 것만 같았다. 이해가 쉽게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홍대에서 경복궁까지가 8km 정도니까 이건 홍대에서부터 ‘어서 오세요 경복궁에’라고 쓰여 있는 격이 아닌가?
그 8km조차도 평평한 도로가 아니라 오르막이 끝나지 않고 내리 이어졌다. 말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힘들어서 죽는다는 기분보다는, 스트레스의 압박이 종주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르막 뒤 나타나는 내리막조차 기분이 나아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 조금 있다가 다시 이 길을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11월인데 숲으로부터 매미소리가 들려왔다. 11월에 매미소리라니, 정말 또 다른 나라에 온 것만 같았다. 쭉 내리막을 내려온 뒤 곶 주변을 감싸는 드넓은 바닷가를 지나는 해안도로를 통과했다. 오르막길은 끝나지 않았다.
출발할 때는 어두웠던 하늘의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하고, 드라마처럼 푸른 모습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난히 길에 나비들이 많이 날아다녔는데, 나비들이 꼭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겠지? 이게 마지막 오르막길이길 정말 빌면서 죽을 둥 살 똥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시야 저 멀리에 낯이 익은 조형물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온 곳의 조형물이 대체 왜 내 눈에 익숙한 걸까. 1년 전 군대에서, 일본 종주를 꿈에 그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후기를 검색해서 읽을 때부터, 그리고 구글 지도에 최북단과 최남단을 검색하면서 일본 종주를 준비할 때부터, 사진으로 수도 없이 이 조형물을 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본 최남단 사타곶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사타곶에 위치해 있는 북위 31도 기념비였다.
이렇게 힘겹게 찾아온 기념비적인 관광지 치고는 굉장히 한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31도 기념비에서 조금 더 들어가야 사타곶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거기서 몇 킬로를 더 가야 한다고 했으면 화를 낼 뻔했지만... 다행히도 200m도 가지 않아서 '일본 본토 최남단 사타미사키'라는 안내문과 함께 인포메이션 센터, 많은 차량과 바이크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끝났네..."
바다 건너 저 먼 곳에는 정말 말 그대로 최남단을 나타내는 듯한 한 등대가 보였다. 자전거를 끌고 그곳까지는 갈 수 없었으므로 이곳 전망대에서 눈으로만 담았다. 드라마처럼 맑게 개인 날씨와, 끝이 보이지 않는 최남단에서 바라보는 태평양. 하지만 감격스러움은 이미 아까 8km 전에 미리 느껴버려서인지 들지 않았다. 끝났다는 후련함도, 성취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힘들었기에 이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