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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Apr 10. 2021

체리엔딩

제 1 장 9국에 4025

"여보세요?“

"..."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아, 거, 거기.."

"말씀하세요."

"..처,철수집 아입니까?"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뚝.' 

상대방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차가운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휴~'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듯 전화기를 보다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동그란 기계식 다이얼을 망설이며 하나씩 돌렸다.

"9국에..4..0..2..5.."

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는 다시 전화를 받았다.

소년은 숨을 꼴딱,하고 삼켰다.

"여보세요?"

아, 또다시 그녀의 엄마였다.

"여보세요?!"

"..." 

소년은 숨이 가빠져 수화기를 든 채 얼어 붙어버렸다.

"너! 자꾸 장난 전화하면 혼난다!"

전화기가 딸까닥! 짜증섞인 소리를 내며 끊겼다.

"진아, 니 학교 안 가나~? 니 또 늑장 부리모 학교 지각한다~!"

소년의 엄마가 부엌에서 소리 질렀다.

'에이씨,'

소년은 벌떡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 뛰어나갔다.     


소년의 집은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가옥이었다. 디귿자로 앉혀진 본채의 중앙에는 온갖 꽃과 나무가 가득한 일본식 정원이 있었고 정원 한 쪽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장독들이 빈틈없이 자리를 차지한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 옆으로 거북이 등짝 같이 둥그렇게 배가 튀어나온 거대한  빨래돌이 한 가운데 놓인 빨래터가 있었고 빨래터 너머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텃밭이 있었는데 거기엔 외할머니가 심어놓은 배추와 깻잎, 고추와 상추가 제자리도 없이 여기저기 섞여서 자라고 있었다. 무쇠솥과 곤로가 한 쪽 벽면을 차지한 재래식 부엌 옆으로는 철마다 해군에서 보내오는 식재료(진이 외할아버지는 해군에서 보급창장을 하다가 퇴역을 했는데 후임 보급창장이 관례에 따라 일년에 몇 차례 식재료를 보내 주었다)를 보관하는 두 평 남짓한 창고가 달려있었는데 그곳은 도둑 쥐와 도둑고양이들이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장소였다. 본채를 마주보고 지어진 10평 남짓한 별채에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외삼촌과 이모가 살고 있었고 본채를 돌아 대문으로 나가는 회랑 끝에는 심은 지 백년도 넘은 것 같은 감나무와 오동나무가 자리를 다투며 살고 있었다. 감나무 기둥에는 누가 언제 데리고 들어왔는지도 모를 변견 한 마리가 2미터도 안 되는 짧은 줄에 묶인 채 주인이 주는 하루 한 끼 밥을 얻어먹으며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기 방을 나서 다다미 마루방 문과 복도의 문을 하나, 둘 차례로 열고 뛰어나갔다.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소리 질렀다. 엄마는 부엌에서 '신발 꾸게 신지 말고 똑바리 신고 가라!'며 마치 소년을 보고 있는 듯 소리 질렀다. 

소년은 본채 정원과 감나무 회랑을 지나 거대한 나무 대문 앞에 섰다. 소년이 끙,하며 대문을 두 손으로 열어젖히려 했지만 무거운 대문은 잠시 움찔할 뿐 쉽게 틈을 주지 않았다.

“이 씨,”

소년은 다시 뒤로 다섯 걸음 물러선 뒤 힘차게 도움닫기를 했다.

쿵! 소년이 한쪽 어깨로 육중한 나무문에 부딪히자 그 반동으로 작은 소년의 몸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틈이 열렸다. 소년은 그 틈을 파고 들어 낑낑대며 대문을 빠져나갔다.   

대문을 빠져나온 소년은 잠시 멈춰서서 골목의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을 먹은 듯 왼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골목의 오른쪽은 큰길로 이어져 있었고 골목의 왼쪽은 작은 골목길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큰길은 넓어서 뛰어가기 좋았지만 소년은 매번 오른쪽 좁은 골목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오른쪽 길 앞에 있는 황금댁이라는 할망구 때문이었다. 황금댁은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정면에 있는 동네 막걸리집인데 그 집 막걸리가 황금처럼 노랗게 빛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황금댁의 주인은 황금 같이 누런 이빨을 가진 뚱뚱보 할매였다. 황금댁은 뚱보 할매가 자신이 담근 막걸리에 ‘남자들에게 좋은’ 특별한 보약이 들었다 소문을 내는 바람에 아침 나절부터 온 동네 술쟁이들로 바글거렸다. 소년은 걸음마가 끝나자마자 외할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했었다. 자식이 없었던 황금댁은 빈 술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받으러 온 꼬마를 자기 자식처럼 물고 빨고 예뻐해 주었다. 황금댁은 소년이 막걸리를 받으러 갈 때마다 술지게미 냄새가 쩔어 있는 손으로 소년의 뺨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소년은 그때마다 ‘아아아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골목 왼쪽 첫번째 모퉁이 집에는 양복쟁이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양복쟁이 아저씨의 아들 둘은 소년의 친구들이었다. 소년보다 한 살 많은 장근이와 한 살 적은 보성이였다. 장근이 집 앞 왼쪽으로는 어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골목이 이어졌는데 그곳은 항상 똥냄새가 가득했다. 그 골목은 소년의 외가 본채 뒷간과 이어진 모퉁이에 있었던터라 알고 보면 그 똥냄새는 소년의 외조부모의 변내였다. 그 골목은 지나가다 혹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한 사람은 분명히 뒷걸음질을 해야했기 때문에 소년은 골목 초입부터 최대한으로 속도를 높여 질주했다. 

똥통 골목을 벗어나면 다시 오른쪽으로 조금 긴 골목이 이어졌는데 골목의 왼편에 있는 녹색 철제 대문집은 얼마 전 서울로 전학을 간 친구의 집이었다. 언젠가는 소년이 그 집에 놀러갔다가 녀석의 엄마가 대문을 잠궈 놓고 마실을 나가는 바람에 까마득히 높은 철제 대문 위에서 눈을 감고 뛰어내렸었었다. 소년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에 전기가 찌릿찌릿 흘렀고 일어날 힘도 없어서 땅바닥을 벌벌 기어 집에 갔던 나쁜 기억이 있는 집이었다. ‘아 씨 저 녹색대문..’ 소년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뛰어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나갔다. 

골목을 벗어나니 천도국민학교로 가는 대로가 나왔다. 대로의 건널목에는 엄마들이 노란 앞치마를 입고 노란 깃발을 가로 들고 서서 학교 가는 아이들을 막고 있었다. 군부대로 출근하는 엄청난 떼거리의 자전거들은 속도를 내고 달려오다가 건널목 앞에서 끼이이익! 고무 타는 냄새가 날 때까지 브레이크를 잡았다. 숨가쁘게 골목을 뛰어나온 소년의 앞에서 때를 맞추어 어머니회의 깃발이 위로 열렸다. 뛰어오던 속도 그대로 건널목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소년의 얼굴에는 어느새 땀에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소년이 달리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오늘도 등교길에서 9국에 4025를 보기 위해서였다.

      

학교 정문 앞 큰길에는 등교하는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다. 차도 안 다니는 학교 앞 인도 반쪽을 이유도 없이 텅 비우고 왼쪽으로만 걷게 하는 일제식 좌측통행 때문에 아이들은 좁은 도로에 우르르 몰려서 걸어야했다. 바글거리는 아이들 탓에 소년은 속도를 내서 뛸 수도 없었다. 소년은 요리조리 날래게 아이들을 피해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오데 가고 이쓰낀데..' 소년이 안타깝게 궁싯거렸지만, 그가 찾는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씨, 벌써 가뿠나.."

소년의 발걸음은 터벅터벅 바뀌었다. 시무룩해진 소년이 그만 포기하려던 바로 그때, 소년의 눈에는 저 멀리, 아주 저 멀리서 무언가가 반짝, 하고 빛이 난 것 같았다. 그 아이의 머리핀인지 그 아이의 눈빛인지 그 아이의 가방에 붙어 있는 마름모꼴 쇠붙이인지도 모를 무언가가 반짝, 빛을 발한 것이었다. 소년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와글와글 학교 정문 계단으로 올라가는 아이들 사이를 헤집으며 뛰어올라갔다.

 

계단 끝에 오르자 2학년 학급 건물 신발장 입구에 들어서는 그 아이가 보였다. 소년은 마침내 그 아이의 뒷모습과, 신발을 실내화로 갈아신느라 살짝 구부린 옆모습을 보는데 성공했다. 9국에 4025, 바로 그 아이였다.

"흐흐, 히히히히."

소년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하하하하하하!"

그때, 카랑카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소년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소년은 소름이 돋았다. 뒤를 돌아보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아이 하나가 소년 앞에 서 있다.

"..아 또..머고?.."

하얀 드레스는 무서웠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매일 똑같은 시간, 똑 같은 자리에서 소년을 기다리고 서있다가 '아하하하하하하!'하고 똑같이 웃어댔다. 소년은 하얀 드레스가 매일 소년의 뒷통수에 대고 '아’ 한 번, ‘하' 여섯 번 웃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소년도 매일 아침 9국의 4025를 보면 비슷한 소리를 냈으니까. 하지만, 소년이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렇게 귀신 같이 웃었던 하얀 드래스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휙하고 돌아서서 자기 교실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가시나.. 귀시이가.. 맨날 허연 색 옷을 입고.. 으으..'

소년은 중얼거렸다.

‘내 이름이 뭐다, 니 이름은 뭐냐, 니는 2반이지, 나는 1반이다 말을 하든지.. 못 섕긴 기 옷만 허연 거 입고서는..’ 소년은 툴툴거리며 실내화를 갈아신고 계단을 올라 나무 복도로 들어섰다. 

1반 창문 안에서 하얀 드레스가 소년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소년은 고개를 휙 돌리고 잰 걸음으로 복도를 달려갔다. 2반 교실 앞을 지나 3반 교실 앞을 지나갔다. 수업을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복도를 곧장 달려가던 소년은 4반 교실 뒷문에 달싹 붙었다가 다시 뒤돌아서 천천히 3반 교실 앞문으로 다가갔다. 살짝 열린 앞문으로 3반 안을 훔쳐보았다. 2분단 첫째 줄, 그 소녀가 앉아있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 반짝반짝, 소년은 소녀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진아, 니 요서 머하노?"

하필이면 그때, 교실로 향하던 담임 선생님이 나타났다. 담임 선생님은 엄마의 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었고 가끔 진이의 집에도 놀러왔었다. 

화들짝 놀란 소년이 헉, 돌아서서 죄지은 듯한 눈초리로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희자 아줌마.."

"야, 니 학교 오모 선생님이라 부르라 했잖아."

"..예, 희자 선생님."

"희자 빼고 고마 선생님, 임마."

"예, 선생님."

"수업 시작한다. 들어가그라." 

소년은 후다닥 자신의 반인 2반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소년이 교실로 들어가자 희자 선생님은 3반을 돌아보았다.

맨 앞줄, 그녀도 반짝거리고 있는 9국에 4025를 담박에 알아볼 수 있다.

희자는 피식 웃고 2반을 향해 돌아섰다. 

교실 창가를 따라 늘어선 벚나무에 가지마다 바알간 꽃봉오리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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