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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Feb 21. 2022

내 나이 마흔이 다 되어도 '어른'이 필요하다.

'어른이 되었어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20년 전 중·고등학생일 때는 '어른'들이 너무 싫었다. 


역시 사춘기가 가장 큰 이유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나의 선택들에 조금도 방해받기 싫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온갖 것들이 '통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난 직후에는, 그동안 가둬두고 있었던 억압된 것들을 표출하기 바빴다. '보호자' 없이 밤낮 놀러 다니고, 나의 '자유의지'로 국내나 해외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다. 


그런 기분 좋은 만끽도 잠시, 또다시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억압 속으로 뛰어들긴 했다. 으레 짐작하듯 군대다. 그러나 미처 '어른'이 되지 못했을 때의 압박감과는 느낌이 달랐다. 군대는 '내가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어떠한 과제와도 같았다. 뭐랄까.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군대도 갈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해서 이때는 그다지 반항심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성인으로서 얻게 된 나의 의무'를, 남들보다 더 멋지게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현역 복무까지 마치고 나왔을 때, 비로소 나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어른'에서 '조금 더 자란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고작 20대 중반에 막 접어든 주제에,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을 깜찍하게 바라봤다. 참 우습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30대가 되었을 때는 나보다 어린 모든 이들이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스스로가 풋내기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며 지내던 나는, 몇 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 직장생활도 지냈다. 


그리고, 어느덧 불혹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 어른을 찾게 된다.

그간 거쳐온 모든 나의 과정에 불만도 미련도 없다. 다만, 요즘 깨우치고 있는 것은 '어른'이 왜 필요한가이다. 이것은 요즘 소위 말하는 '꼰대'의 정의와는 분명 다르다. 말하자면, 이건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어른'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흔이 코앞인 내가 '어른이 필요하다!'라고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예능 프로에서 배우 윤여정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도 60이 처음이라 60에 하는 모든 것이 서툴다'라는 이야기였다. 그건 매우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분의 말은 아마도, 같은 60대뿐만 아니라, 많은 '어른들의 돌덩이 같은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게도 무엇이든 혼자 해내는 것을 보여주고 싶던 마음이 있었다. 이제 지독히도 쓸쓸히 혼자 꾸역꾸역 무언가를 해내던 내 태도를 조금이나마 버렸다. 나 역시 나이 서른도 처음, 마흔도 이제 처음인데, 스스로에게 가혹했다. 물론 '치열함'까지 버릴 생각은 없다. 안일한 태도는 내가 경멸하는 것 중 하나이다. 다만, 그중에서 '무거운 자책'과 '의연한 척'을 내려놓고자 한다. 지나친 표출은 막아야겠지만, 때때로는 잠시 어른인 척을 관둬야 할 것 같다. 


이제 점점…. 어른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스무 살 이후에는 무엇이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수준이었다. 도처에 도사린 위협 속에서 아직 날갯짓도 못한 어린 새에 불과하다 느껴진다. 작금의 나에게 어른이 더욱 필요하게 된 까닭을 요약하자면 이것이다. 


무한하게 늘어나는 '책임'을 조금 더 튼튼하게, 오랫동안 들어 올리기 위함이다. 

하나둘 두 손위로 얹어진 무게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 늘어나는 짐들을 조금 더 수월하게 들고 버티는 어른들이 곳곳에 보인다. 때때로 마주친 그들은 나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깨우치게 해 주었다. 그 사람들은 내 두 손에 짐이 가득하면, 어깨에 이거나, 등 뒤로 메고 가는 또 다른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따금 정말 고단할 때면, 잠시 짐들을 한편에 두고 쉬어가도 괜찮다고 일러주었다. 한 때의 나는 행여 두 손 위의 것들을 내려놓게 되면, 막연히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진정한 나의 것'들은 설사 잠깐 휴식을 취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배움을 얻었다. 


'긴 여행을 할수록 도중에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는 가르침은 나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삶을 경주하면서 때로는 비바람을 맞기도 하고, 뙤약볕 사막을 걷기도 할 것이다. 그때마다 필요한 물건들은 더욱 잘 움켜쥐고,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과감히 두고 가라 그렇게 알려준 사람들이 있다. 그 덕에 나는 과거의 나를 잘 흘려보내는 중이다.  




흔히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막연하게 상상을 해보기엔 매우 적합한 숫자인 것 같다. 미성년자라고 하면 0세~19세까지이다. 그렇다면 20세~100세의 월등히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는 꼴이다. 성인들은 너무 많고, 그중 '다 자라지 못한 사람들'도 지천이다. 


글쎄….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당장 나조차도 누군가에게 '어른'이었던 적이 결코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 성인을 따로 구분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의 무게를 모르고 어른들을 몹시 싫어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내게 어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앞으로도 그들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 역시 확고하다.


성인이 된 후 크게 변한 것이 하나 있다. 과거엔 온갖 것들로부터 통제당하는 삶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나 스스로를 억압시키고 제어해야만 하는 삶이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뒤틀려가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그런 나의 감정을 단번에 알아봐 주는 어른들이 있다. 


나는 정말이지 앞으로도 이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이따금 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큰 위로를 받게 될 것 같다. 그리고 터져 나온 감정을 잘 흘려보낸 뒤에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죽는 순간에도 '어른'은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나이'와는 상관없는, 

어쩌면 나보다도 연령은 어릴 수 있는 그런 '어른'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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