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왕고래 Feb 27. 2022

굿바이 캡틴, 이어령을 추모하며

- 백락일고(伯樂一顧) -

젊은 날 '캡틴'이라 여겼던 이어령 교수님이 세상을 떠났다. 선거로 격렬하게 싸우던 양 쪽의 진영이, 오늘만큼은 한 목소리를 낸다. 각계의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조문, 언론인들의 품격 있는 특집 기사, 저명한 문화예술인들의 추모, 각계 각 곳에서의 목소리가 온통 교수님을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이 추모는 남루하다.

그리고 초라하다.

그래도 괜찮다.


사실 이건 나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함이니까.




뉴스에서는 초대 장관이자 교수님, 고문, 선생님 등 다양한 호칭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태껏 그가 지나온 삶을 말해준다. 저 대단한 분의 인생 어느 한 부분에, 스쳐갔던 나도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반대로 나의 20대 시절 한 켠에는, 그의 자리가 꽤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다.


철없을 때 교수님에게 틱틱거렸던 기억이 난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툭툭 내뱉는 배설과도 같은 말. 그것에도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던 모습은 참 또렷하다. 아무튼, 그때가 소위 말하는 나의 '변곡점' 중 하나였다.


천리마와 백락

20대 시절의 프리랜서 기자 활동은 나에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 좋은 기회이자 경험이었다. 특히 정책 분야의 기사들만 줄곧 작성하던 나는 이어령 교수님을 만날 기회가 매우 잦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손꼽히는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고문이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이 아니시던가. 거의 모든 정권에서 그의 고견을 청취하기 바빴다.


늘 시대에 맞는 혜안을 내놓아 큰 공감대를 일으키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가 박완서 씨라던지, 백남준, 황석영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또 그들로부터 칭송 어린 말씀을 듣던 그런 분. 이런 분을 이렇게라도 종종 뵐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사했다. 기사를 위한 인터뷰나 청취의 기회가 더러 있었던 덕이다. 그렇게 몇 년간 이따금씩 그를 만나게 됐다.


꽤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을 무렵. 한 번은 방송에 같이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젊은 층을 대표해서 나갔고, 그분은 진행자 옆에서 대담을 나누는 패널로 등장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아마 '신년맞이, 이 시대의 어른에게 방향을 묻다'와 같은 주제였던 것 같다. 무려 생방송이었다.


줄곧 여러 가지 대담이 오가긴 했다. 다만, 생방송 특성상 정제된 표현과 질문들만이 계속됐다. 내용에 대해 딱히 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가슴에 남아있는 건 그 이후의 장면들이다. 방송이 끝나고 난 뒤에도 그는 한참을 현장에 남았다. 그리곤 젊은이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빨리 귀가하려던 나까지 세트장에 계속 남아있던 이유다.


저 연세의 교수님이 방송 종료 후에 더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신기했다. 젊은이들의 가벼운 질문까지 진중하게 답해줄 거란 생각은 못한 것이다. 십수 년 전... 20대 시절의 나는, 그 소중한 기회에 볼멘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잘난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전 엄청 느리거든요. 제가 어떻게 경쟁력을 갖춰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곧 30대가 되어가니까 주변에서 온통 독촉뿐이에요. 아직 프리랜서이고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니까요. 저는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지 생각을 더 깊게 해보고 싶습니다. 근데 당장 취업하지 않으면 매장당할 기세예요. 이런 상황에서 아까 말씀하신 건설적인 미래를 그려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내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런데도 교수님은 답변을 하는 데에 일말의 고민이 없었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당신께서 자주 이야기하던 '천리마'와 '백락' 이야기를 꺼냈다. 요악하자면, 『천리를 달릴 수 있는 재능 있는 '천리마'조차, '백락'이라는 사람이 알아보기 전에는 그저 촌에서 짐이나 나르던 '보통의 말'이었다는 것. 즉, '천리마'를 알아본 '백락'이 있었기에 비로소 그 말이 천리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가장 큰 장면이, 바로 조명 꺼진 스튜디오 뒷문에서 나눈 이 대화다.


"온갖 사람들이 다 '천리마'가 되려고 하는 것 같아. 물론 한국에 대단한 천리마들이 많지. 근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많거든. 근데 '너도나도 천리마가 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드는 것 같아. 지금 우리 사회가."


첫 말씀부터 퍽 위안을 받았다.


"그런데 천리마도 '백락이 없어서는' 천리마가 아닌 거야. 백락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천리마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거지. 우리 모두가 천리마가 될 순 없어. '천재'는 따로 있는 거거든. 나도 천재가 아니야. 근데, 모두가 백락은 될 수 있어. 천리마가 '능력 있는 사람'만 두고 얘기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천리마는 나를 업고 달려줄 '귀인'이 될 수도 있고, 시대의 '기회'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주변에 정말 많은 '천리마'가 있을 거야. 냉정하게 말하면, 모두가 다 특출 난 천리마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런데, 이 '백락'도 정말 값진 일이거든. 단순히 보람을 얻는 것 말고도 말이야. 게다가 백락은 누구나 될 수 있으니까. 본인이 주변을 잘 파악하고 시대를 읽으려 노력하기만 한다면."


백락으로 살고자 결심했던 순간이다.




당시의 나는 적잖이 여러 방면에서 좌절을 겪고 있었다. 원래 성격이 느릿느릿한 편이어서, 30대를 앞두고도 미처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어떤 것으로 30대의 포문을 멋지게 열 것인가' 고민하며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안팎에서도 압박이 들어왔다. 수많은 독촉 속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무엇이라도 당장 시작하지 않고서야, 그 수많은 화살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당시의 나는 페이스를 잃어버렸다. '기준점'이라 포장된 화살과 비난을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했다. '나 스스로 천리마가 되어보려' 안달이 났던 거다. 특출 나게 잘 달리는 '천리마'들에게만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래서 '저만치 달리지 못하면 나는 어떡하지?'라는 막연한 걱정만 쏟아냈다.


그때 교수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나는 내가 '천재'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천리마는 못 되어도, 백락은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가 다시 떠오른다. 교수님은 그 불 꺼진 스튜디오에서 막 나가시려다가, 불현듯 잠깐 멈추셨다. 그리곤 뒤돌아서서 한 손을 반쯤 들고, 무어 말씀하시려 했다. 결국 그 이야긴 듣지 못했다. 미처 다 올리지 못한 손도 내리시고는 이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그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걸까. 글쎄, 조금 짐작이 가기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겠지. 그 확실치 않은 추측은 그저 마음속에만 간직하는 게 옳다.


떠나는 순간까지 어느 젊음보다도 빛이 나던 분, 캡틴! 저도 더 나은 백락이 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죽는 날까지 곳곳에 숨어있는 천리마 누구 한 명이라도 더 찾아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추모를 이만 마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벼운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좋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