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이고 싶은 당신, 부디 영리하게 착해지세요.
'김 팀장님'은 사람 좋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사내 안팎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수십 년 동안 회사에서 단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그래서였을까. 인턴을 갓 벗어나 신입이었던 나와 동기들에게는 한 동안 그분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매일 선배들에게 대판 깨지기 일쑤였던 사회초년생들…. 우리에게는 따뜻함이 간절했다. 동기들은 '언젠가 인사발령이 난다면, 저분과 근무해보고 싶다'는 말을 앞다퉈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운이 나에게 왔다!
정기 인사발령에 그분이 우리 팀의 팀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첫 인수인계 2주 동안 쭉~ 그를 지켜보며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활기차게 아침마다 인사하는 모습, 부하 직원들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 모습,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모습, 기타 여러 가지 팀장님의 태도에 한 동안 출근길이 들뜬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사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별달리 대답도 안 한다. 한 번은 탕비실에서 "김 팀장님 오시니까 정말 좋지 않으세요?!"라 말하자, 사수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확히 1개월 뒤. 나는 점점 그의 표정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팀장님과 함께 있으면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우리들' 때문이었다. 팀원들을 악역으로 만드는 그의 행보에 우리는 나가떨어졌다. 그의 천사 같은 발자취는 안팎으로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1. '회사의 모든 잡일'은 우리 팀에게로, 잡일 전담반
우리 과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면 각 팀에 업무를 할당했다. 으레 그렇듯, '돋보이는 일'이라면 서로 가져가려고 안달이다. 또 반대로는 '모든 팀이 기피하는 잡일'도 많았다. 야간작업이라거나 장기간 지방 로케이션 촬영들이 그랬다. 그럴 때가 되면 팀장급 회의마다 고성이 오간다. 하지만 우리 팀은 평온(?)했다. 팀장님이 모든 업보를 떠안으시기 때문이었다.
한창 열을 올려 팀 업무들을 분배하다가,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다른 팀장들은 우리 팀을 바라봤다. "이건 김 팀장이 맡아서 하면 왠지 잘할 것 같은데...?"로 시작한 스며드는 떠밀기는 "맞아, 이건 김 팀장 쪽이 제일 적합하지."라는 동조를 얻어가며 더욱 힘을 발휘했다. 팀원들은 뒤에서 절대 이 일만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팀장님은 뒤편의 우리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럴까요, 그럼~? 저희가 하죠 뭐~." 늘 이런 패턴으로 흘러가자 우리는 서서히 지쳐갔다.
2. '우리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인 팀장님
그러다 보니 갈수록 성격이 드세지는 건 팀원들이었다. 다른 팀 팀장급이나, 그 밑에 과장급 인력들과도 부딪히는 일이 빈번했다. 한 번은 하다하다 바로 옆 팀의 대리가 우리 팀장님에게 일을 시키는 지경이 됐다. 그 대리는 "팀장님, 이거 제가 하고 있는 건인데요. 사실 이거 팀장님 식구들이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혹시 도움 좀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럴 때마다 팀장님이 거절을 못한다는 것을 알고 펼치는 계략이었다. 미소를 띄고 있지만 영락없는 업무 떠넘기기였다.
사수와 나는 아주 깊은 분개를 가까스로 눌러가며 적당히 화를 냈다. 팀장님이 수락하게 되면 어차피 우리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왜 저희가 합니까!?"라고 말하자 그 대리는 "아니, 서로 도우면서 하자는 거지! 뭘 그렇게까지 얘기해?"라고 되받아쳤다. 이런 건 초반에 강하게 거절해야 확실하게 끊을 수 있다. 우리는 더 세게 되받아치며 완고히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착하디 착한 팀장님이 직접 나서신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아닌 다른 팀의 대리를 달래주었다. 이외에도 비슷한 일은 많았다. 팀장님은 우리 팀원들이 강하게 이야기할 때마다, 곧바로 상대팀에게 달려가셨다. 이번 해프닝의 옆 팀 대리에게도 "아이고, 그럼 그럼, 이거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애들이 지금 예민한 것 같네~. 내가 잘 얘기해볼게."라고 말했다. 그때 우리는 생각했다. 「저분은 어쩌면 '우리 팀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라고.
3. 무책임을 착함으로 포장하지 말 것
우리 팀 7명 전원이 결국 한마음으로 분노하게 된 일이 있다. '직장인들의 로망이자 단 하나의 희망'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바로 '인사고과'다. 여기서도 김 팀장님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인사철이 되면, 보통 과에서는 팀의 개인마다 점수를 매겼다. 그리고 가장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는 인원들을 팀장끼리 협의하여 추려냈다. 우리가 'S급'까지 바란 것은 아니다. 그저 A가 1명, B 등급이라도 몇 명 있었으면 만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A는커녕 B에서 겨우 한 명, C로 포진되어 있는 팀원들의 등급을 보고 우린 망연자실했다. 일거리를 넘기던 옆 팀 대리네 팀에서는 S가 무려 3명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 어떤 업무가 다가와도 열의를 보이기 어려웠다. 우리가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이뤄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뜻은 아니었다. S와 A등급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은 수십 개의 팀 중 우리 팀뿐이었다. 적어도 우리 팀에서 1명 정도만 나왔더라면, 허탈함도 없었을 것이다.
뒤이어 그날 저녁 이어진 회식, 팀원들은 모두 자포자기했다. 여러 명의 팀장이 김 팀장님에게 건넨 말 때문이다. "야유~ 김 팀장 덕분에 아무튼 우리 애들 기 좀 세워줬네. 고마워! 한잔해!" 따위의 말들이 우리 앞에서 몰아쳤다. 며칠 동안 이어진 인사 관련 회의. 그곳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졌을지…. 팀원 모두가 짐작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팀장님을 피했다. 회사에서의 짬밥이 차다 보니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하더라. 다른 비슷한 또래나 후배 직원들도 점차 그를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술자리나 식사자리 등 이런 이야기를 하소연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그리고 우리가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모두가 '회피'를 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측근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팀장님의 능력 때문이다. 언젠가 과장님이 직접 나서며 "팀장님, 인간적으로 저희가 이번 지방 프로젝트까지 어떻게 맡아서 합니까. 그리고 저희하고 있는 일 좀 보세요. 솔직히 다 잡일밖에 없어요. 애들 고과도 생각해 주셔야죠."라고 말을 했었다. 그때 팀장님은 "그래도 누군가는 양보해야지~"라고 답하시거나, "나는 좋은 뜻에서 그런 거지..."라며 우리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의 옆에서 우리는 갈수록 비참해졌다. 팀장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죄책감은 짙어져 갔다. 드센 싸움꾼을 넘어, '조직을 위한 생각이라곤 하나도 하지 못하는 이기주의자'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착한 것은 좋다.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나. 다만, '스스로 착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변 사람을 악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의 선의를 강조하기 위해 주변을 더 어둡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 팀장님 아래에서 함께 성장한 팀원들의 현재 모습은 비슷하다. 십 년 정도 지난 뒤, 지금의 우리들은 회사에서 각자 지독한 쌈닭들이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이것도 하나의 가르침이었을까? 갑자기 난데없는 웃음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