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대뜸 후배가 찾아왔다. 가볍게 브런치를 즐기다가 녀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형님은 늘 트러블이 없으신 것 같아요. 우리 모임에서도 그렇고, 딴 데서도 그렇고요." 그리고는 뒤이어 '어떻게 사람들이랑 항상 원만하게 지내냐'고 물어왔다. 사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응, 나는 트러블이 생길 것 같으면 그 사람(상황)을 피해.
이건 내가 선택한 아주 손쉬운 회피책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둥글둥글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나는 제법 예민한 사람인 것 같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게 피곤하다는 것을 깨우쳐서 퍽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을 뿐이다.
20대 때는 성격대로 살았다. 그러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어느 조직에서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30대 무렵에는 내 성격을 조금씩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 40대를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나에 대한 진단을 내리게 되었다.
첫째, 나는 예민하다.
둘째, 나는 스트레스에 강하지 않다.
셋째, 일은 힘들지 않은데 인간관계는 힘들다.
대표적으로, 이 세 가지가 내가 내린 스스로의 진단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매우 냉정하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스트레스의 근원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예민 보스의 사회생활 생존기'라고 하면 어떠려나.
멀쩡한 성인이 어찌 스트레스가 없을 수 있을까? 그래도 '일'이라면 내가 머리를 굴려 대다수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발생한 스트레스의 지분 절반이 타인에게 있다. 때문에 이 문제는 복잡하다. 내가 해결을 하려 해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나에게 스트레스가 될만한 사람(상황)'을 아주 유심히 찾아낸다. 그래서 애초에 그 사람과 엮이게 될 모든 요소들을 차단한다. 1) 도저히 내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거나 2) 매우 무례하거나 3) 빈번하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 기타 여러 사례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제 중년이라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니 인지가 빠르다. 그동안 내가 어떤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왔는지 데이터가 명확하게 누적되어 있다.
이후 그들을 최대한 피하며 사는 것이 내가 택한 방식이었다. 물론 이따금 피할 수 없는 만남도 유지되기는 했다. 어떻게 모든 관계를 내 뜻대로 할 수 있으랴. 그럴 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바로 조력자를 찾는 것이다. 나의 스트레스를 경감시켜줄 인물을 필사적으로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이 방법은 특히 회사에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누군가로 인해 받는 나의 깊은 빡침-, 그것을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곁에 포진시켜두자 아주 원활한 생활이 가능했다. 일전에는 혼자 끙끙거리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아니다. 공감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다는 것. 그건 꽤 어마어마한 방어막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 보니 공교롭게도 주변 지인들 대다수가 '자존감 요정'들이다. 만남에 있어 늘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거의 그들만 곁에 남게 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아주 특이한 점도 하나 찾아냈다. 나의 인간관계는 점차 좁아지는데, 반대로 더 풍성해지기도 했다는 점이 그렇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엮여 있을 때, 나는 더 외로웠다. 당시 내 시야 안의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멀찌감치 작게만 보였다. 혹은 너무 많아서 출근길 만원버스처럼 불편하게 끼여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찾아보지 않아도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들은 저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이 사람들을 찾느라 아주 애먹었다. 나는 내가 찾은 '예민 보스의 생존 방식'이 퍽 맘에 든다. 보이는 것이 몽창 줄어들자 집중하게 된다. 상황이든, 사람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