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조악한 마케팅, '워. 라. 밸.'에 관하여
오랜만에 후배들을 만나 저녁 식사와 반주를 곁들였다. 한잔 두 잔 들어가니 녀석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껏 가장 후회되는 것이 '20대 때 더 놀아둘걸, 너무 빡세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되묻는다.
"선배는 가장 후회하는 게 뭐예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워라밸."
많은 동료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늘 오르내리는 단어. '워라밸'은 유행을 넘어 직장인들에게 어느 정도 보편적인 키워드로 자리 잡힌 것 같다. 알려진 뜻 그대로 '워크(work)-라이프(life)-밸러스(balance)', 즉 '일과 삶의 균형'을 말한다. 특히 최근 입사한 친구들의 경우 이것에 많이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뭐, 워라밸이 나쁘지는 않다. 아주 좋은 말이라는 데에 이견도 없다. 아마 다들 그럴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워라밸'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왜 '워라밸'을 후회하느냐? 과거의 나는, 이 '워라밸' 마케팅에 호되게 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워라밸'은 사회 중심에 파고들어 굉장한 파급력을 갖게 됐다. 기업 등 수많은 '장사꾼들' 역시 이 단어를 활용한 다양한 마케팅을 펼쳤다. 그렇게 사람들은 역으로 또 당하고 말았다. 단어 자체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마치 임무와도 같은, '강제적 의무'로서의 워라밸만이 남은 것이다.
내가 그랬다. 너무 쉽게 여기에 현혹되었다. 현명하게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저 주변의 흐름에 편승하는 바람에 내 페이스를 잃어버렸다.
회사에서 연차가 쌓일수록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심을 가졌다. 야근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거의 반사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했다. 돌이켜보면, 그건 '회사보다 내 삶이 더 중요한데?'라며 객기를 부리던 질풍노도의 시기였을 뿐이다. 회사에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들이 늘 있다. 그런데 나는 무책임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거나,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마치 '워라밸'을 찾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라 여겼다.
그렇다고 워라밸을 찾아 대단한 일을 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퇴근길 만원 버스를 타고, 두 배는 더 소요된 시간에 지쳐 집에서 뒹굴거리던 것. 그러고 나선 잠깐 졸았다가 배고픔을 못 이겨 야식을 먹는 것.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인터넷에 빠져있다가 또다시 늦은 새벽 잠드는 것. 그리고 몇 시간 자지 못해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다시 출근하는 것. 이게 가장 보편적인 일상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잘 연락도 되지 않는 친구들과 이따금 술 한잔 했던 것. 억지로 만든 취미활동에 몇 번 참여한 것. 그 취미활동에서 만난 단편적인 사람들과 뒤풀이에 더 치중했던 것. 결재만 하고 다니지 못한 헬스장. 매번 트레이너에게 핑계를 대느라 변명거리를 찾던 시간들. 기타 등등 무수히 많다.
내가 과연 '워라밸'을 잘 찾아낸 것이었을까? 스스로 의문이다.
그 숱한 것들이 어떤 '압박감'으로부터 나왔다. 나도 '워라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회초년생일 때부터 묵묵히 정진하던 동료들은 내외부에서 인정도 받고, 그만한 대접도 받고 있다. 그것이 인격적 대우이든, 혹은 정말 회사차원에서의 처우이든, 연관 업종에서의 스카웃 제의든 말이다. 나 역시 이런 걸 포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엄한 것을 쫒다가 많은 것을 놓쳤다.
그런 것들을 지켜보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나 스스로 「'워라밸'을 잘 지켜내고 있구나」 생각 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가만 생각해보았다. 불과 며칠 전, 늦은 저녁 치킨을 뜯으며 맥주 한 잔 곁들였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게 바로 '워라밸'이지!」라고 말이다.
고작 이런 걸 하려고, 고작 이런 생각을 하려고, 나는 회사와 나의 일을 마치 적군인 양 바라봐왔다.
나의 전쟁으로 인해 쟁취한 것은 무엇인가.
늘어난 아랫배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나?
그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