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후진을 하던 차량이 점점 내 차로 가까워진다.
아슬아슬하다.
"어..? 어...?"
철컹!
결국 그 차는 내 오른쪽 범퍼를 긁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간다. 환갑은 족히 넘어 보이는 희끗한 머리카락의 운전자가 내 차를 살펴본다. 이내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멈칫하는 것 같다. 그런데 별안간 그자는 곧 창문을 닫아버리더니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문을 열고 달려가 그자의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선생님. 방금 제 차를 스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자는 꽤 격동적인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디 내 앞에서 사기를 치고 있냐!"부터 시작해서 "너 공갈범이냐?" 따위의 말이 마구 쏟아졌다. 어차피 내 차에는 블랙박스가 잘 작동하고 있었다. 주차장 주변을 힐끗 살펴보니 CCTV도 가득했다. 이 정도 눈치도 없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자의 시끄러운 말들을 뒤로한 채 내 차의 앞 범퍼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다. 미세하게 벗겨진 차량의 모습에 적잖이 마음 아프긴 했지만, 사실 이때까지도 보상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이다. 여전히 우악스럽게 내뱉는 그자의 차 뒤편으로 가보았다. 역시 이곳에도 부딪힌 흔적이 남아있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들을 수집할 수 있는데 이게 웬걸, 돌아오는 게 되려 가해자의 협박이라니. 하도 황당해서 잠시 멍하니 먼산을 바라봤다. 여전히 시끄러운 그자는 "날 뭘로 보고 나한테 감히 사기를 치느냐"라고 까지 이야기했다. 나는 무례한 자에게 결코 화를 참지 않는 편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쏟으면 정신건강에 매우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 됐습니다. 그럼 그냥 가시던가 하세요. 저는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 말은 매우 진심이었고, 나는 곧바로 차 안에 놓인 전화기를 가지러 갔다. 머릿속에는 이미 이다음의 계획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첫째, 먼저 경찰 신고를 하자.
둘째, 그다음 옆에 있는 카페의 실외 CCTV를 확보하고,
셋째, 혹시 모르니 내 옆에 주차된 차들의 차주에게도 블랙박스 영상을 부탁드려보자.
한번 마음을 접으면 그냥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다. 그렇기에 그 뒤 이어진 그자의 거친 언행은 더 이상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나이도 어린 게'로 시작되어 '건방지다'라는 말들은 여전히 귓가에 가까웠으나, 어찌 됐든 나는 내 행보를 결정했으니까.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하고, 1,1,2 버튼을 순서대로 눌렀다. 그런데 그때 그 차의 조수석에서 고령의 노인이 문을 열고 내렸다. 거칠게 내뱉는 운전자를 지나쳐 그분은 이윽고 내 앞에 도착했다. 그러더니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두 손을 빠르게 낚아채 붙잡았다. 이후 갑자기 사과를 하기 시작한다.
"총각, 미안한데 나와 이야기해요."
화사하고 예쁜 꽃무늬의 면 마스크가 눈에 띈다. 그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와 내 팔을 붙잡은 노인의 두 손은 굉장히 떨렸다. 그것은 이 상황 때문이 아니라 거쳐온 세월이 그만큼 아득했기 때문이었다. 눈가에 가득한 주름, 얇고 적어진 머리숱, 옷차림 등으로 파악이 됐다.
난 딱히 별말을 하지 않고 붙잡은 두 손만 쳐다봤다. 숫자 1,1,2 다음 이제 '통화버튼'만 누르면 됐는데! 갑자기 방해꾼이 등장하다니.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내게 노인은 줄곧 사과와 용서를 구했다.
"우리 딸애가 말이 원래 거칠고 그래요. 정말 미안해요. 아마 얘가 정말 둔해서 박은 줄 모르고 그랬을 거예요. 우리가 둘 다 나이가 조금 있다 보니까, 그걸 못 느꼈던 것 같아요. 내가 너무 미안해서 어쩌나요. 한 번만 봐주세요.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나는 계속 내 팔을 붙잡은 두 손을 쳐다봤다. 그러자 눈치가 보였는지 노인은 비로소 양 손을 놓았다. 그러더니 이내 두 손바닥을 맞대어 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벌건 대낮에 노인이 내게 그러고 있는 광경이란, 정말 민망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미 도로변 차들의 창문은 내려가는 중이었고, 거리의 사람들도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머님, 이러지 마세요. 그냥 신고하면 됩니다."
만류하는 내게 노인은 다시 팔을 붙들며 간절히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곧 자식에게 달려간다. 그자의 입을 막는 시늉과 타이르는 말 등 여러 가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이가 60이 넘어 보이는 사람도 저따위의 품격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니, 게다가 저런 자의 뒷수발을 어찌하여 저 가엾은 노모가 지금까지 지고 있다는 말인가?
대체 저 연약한 노인의 업보는 무엇일까?
저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는 자식을, 오늘과 같이 감싸 온 지난 세월은 대체 어떠했을까?
그리고 저자는 이런 혜택과 방어막을 곁에 두다니 대관절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다해 저 괘씸한 자를 단죄받게 해야 할까?
저 안타까운 노인의 노력을 참작하여 그냥 넘어가 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의 질문들이 어디론가 쏟아졌다.
나는 당최 누구에게 이런 질문들을 내뱉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결국 수화기의 '통화 버튼'을 미처 누르지 못한 채 두 노인을 보내버린 나는,
'오늘의 선택'에 대하여 또 어떤 생각들을 거듭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