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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Nov 02. 2020

닮았던 우리가 점점 달라져갈 때

"각자의 점토"


조카 녀석이 점토를 갖고 놀고 있다. 

본인이 원하는 모양으로 열심히 빚어내더니, 이윽고 자신만의 작품을 하나 완성해냈다. 그러더니 드라이기를 가져와 본인의 '완성작'을 딱딱하게 굳혔다. 식사 후 녀석은 다시 본인의 작품을 들어보더니, "아! 여기 왜이러지!"라며 일부 수정을 원했다. 그러나 이미 굳을대로 굳어버린 지점토는 그 모양새를 변경하기 어려워졌다. 


예전에는 말랑한 점토와 같이 누구와도 잘 섞이던 우리들인데, 

이제는 세월의 바람을 맞아 각자 다듬다 말아버린 모양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구나. 


불현듯 오랜 친구들이 떠오르는 건 왜인지.




"변한 건 환경일까, 그것을 택한 우리들 자신일까"


어렸을 적 '우정' 하나면 다 될 것 같았던 그 시절 역시 분명히 흐른다. 

친했던 무리 중 나이가 들수록 함께 깊어지는 관계가 있는 반면, 점차 멀어지는 경우 역시 허다하다. 고등학교 때 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공통점으로 온통 닮은 곳 투성이던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색해지는 상황들에 놓인다. 


성인이 된 후 각자를 둘러싼 다양한 환경들은 사람을 완벽하게 변화시켰다. 

놓여있는 모든이의 서로 다른 상황들이 '닮았던 우리'를 다르게 만든다. 경험상 유형도 다양한 편이었다. 주로 삶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기 시작하며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를 애워싸고 있는 거대한 '학교'라는 공통된 환경. 그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조건 속에서 우린 같은 시간을 버텼다. 그러나 이제 거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너무나 다른 상황들에 놓인 것이다. 


어떤 이는 자영업 내지 스타트업에 뛰어들고, 또 어떤이는 대기업에 입사한다. 누군가 10년 째 고시를 준비하고 있을 때, 부모님의 회사를 도우며 평탄하게 사회로 진출한 친구들도 있다.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병에 걸린 뒤 학업을 포기한 이가 있는 반면, 해외 유학길에 오른 자들도 많다. 특히 사회에 진출한 뒤 성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싶은 욕구가 매우 높아지는 이 시점에, 정치성향까지 서로 다르게 되면 필시 만날 때마다 분쟁이 나기 일쑤였다. 


그러다 서로가 놓인 상황을 각자의 기준점으로 만든다. 

이윽고 '따뜻하거나 차가운' 이 수많은 바람 속에서 자신들을 스스로 굳게 만들어버린다. 아주 딱딱하게.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잣대로 세상 모든 것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누구도 비난받을 수 없는 각자의 시간들을 그저 버텨냈을 뿐이었는데.




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조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굳어버린 점토를 결국 수정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모양 그대로 놔두고, 또 다른 점토를 가져와 다양한 작품들을 줄곧 더 만들어냈다. 조카는 굳어버린, 그 맘에 들지 않는 점토도 부수지 않은 채 주변을 다른 작품들로 매꿨다. TV 옆에 녀석이 만들어 놓은 일그러진 점토 인간들은 이제 한 팀을 이뤄 제법 그럴싸해보였다. 어째서 이 점토인형들이 퍽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우리들 모두 다 각자의 풍파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져 있겠지.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 곁에 있어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멀어져가는 친구들을 보며 아쉬웠던 것은, 어쩌면 각자의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같은 온도의 바람을 맞던 '전우'였기에, 앞으로도 늘 그랬으면 하는 '희망' 내지 '바람' 따위도 녹아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을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감히 그들의 무지를 탓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어지다 못해 나는 퍼석해졌던 건 아닐지.

혹여 비라도 맞으면 다시 조금은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적어도 그러고 싶다는 의지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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