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카피 Oct 11. 2023

쓰는 일은 쓰기만으로는 할 수 없다

  내가 카피라이터로서 처음으로 ‘와, 이건 100점짜리 카피다!’라는 칭찬을 받았던 건 어느 건설사 아파트 카탈로그 카피였다. 그때만 해도 건설경기가 호황기였고, 아파트 광고가 넘쳐날 때다. 내가 몸담고 있던 회사는 소규모의 광고기획사였기에 주로 신문, 전단, 카탈로그, 옥외 광고를 도맡아 진행 했다.

  당시 내게 카탈로그 카피쓰기 임무가 주어졌는데 카탈로그는 책자라서 각 페이지마다 헤드카피를 써야했다. 이 때 핵심은 각 페이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아파트의 이점을 정확히 도출하고 이를 명료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 아파트를 차별화하는 콘셉트 페이지를 카탈로그 앞부분에 구성하고, 세부 페이지로 지역 및 교통의 미래가치, 생활 편의, 학군, 단지 이점, 실내 특화 등의 내용을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신입이었던 내게 호흡이 긴 카탈로그 카피라이팅은 당연히 너무 부담스럽고 어려웠다.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의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으며 카피를 써나갔다. 1차 제출, “다시 써! 쉽게 써! 초등학교 4학년도 알아듣도록.” 2차 제출, “다시 써! 군더더기 없이 알맹이만!” 3차 제출, “그래, 이거야. 100점짜리 카피다!” 마지막 완성된 카피는 말 그대로 형용사, 부사가 거의 없는 핵심 문장만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페이지마다 이 아파트를 구매하게 될 소비자 이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아마도 그 때, ‘100점짜리 카피’라는 표현이 이제까지 나를 카피라이터로 살게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 순간의 기쁨과 성취감은 대단했다.     

  이 카피를 다시 쓰고 다듬으며 나는 카피라이팅의 세 가지 핵심적인 방향성을 깨닫게 되었다. 먼저, 목적에 맞게 브랜드(제품)의 특성을 가르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온전한 소통을 위해 타깃으로 삼은 소비자의 언어로 말하는 표현의 명확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둘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시장) 세분화가 기본적으로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깨달았다고 해도 이후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를 업무에 반영한다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현상에 대한 분별과 언어적인 명확성, 논리적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세분화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했다고 해서 이게 바로 실행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삶에 그대로 적용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을 충분히 ‘객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며 같은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나는 ‘객관화’라는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자아개념’을 인식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학습했다. 자아개념이 ‘반사평가’, ‘사회적 비교’, ‘자아지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파악했고, ‘지각’은 ‘삭제’, ‘왜곡’, ‘일반화’, ‘지각여과’라는 심리 기제가 작용하기에 모든 인간 존재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원천적 조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이런 철저하게 ‘주관적’일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을 알고 있을 때, 우리에게 ‘객관화’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내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최대한 ‘객관화’를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보고자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더 많은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그래서 우리는 보고, 느끼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요컨대, 쓰는 일은 쓰기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쓰기 위해서는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아야 하며, 무엇을 써야할지 알기 위해서는 왜 써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것뿐인가. 누구에게 써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며, 어떻게, 어디에 써야할 지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목적이고, 본질이며 핵심 메시지, 콘셉트이고, 타깃이다. 나아가, 매체이고 크리에이티브이다. 한 마디로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글, 특히 상업적 목적이 있는 글은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이며 그런 이유로 ‘커뮤니케이션’보다 ‘전략’이 더 중요하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던 내가 ‘글쓰기’라는 이유로 카피라이터를 선택했을 때 이런 의외의 상황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논리적 사고가 강한 이점이 되는 일의 특성으로 내가 겪은 좌충우돌과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제껏 이 일을 해왔던 가장 큰 이유는 “100점짜리 카피”를 한 번 더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한 이유가 되었던 것은 물질주의를 조장하는 광고가 아닌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여 윤리적 소비에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카피라이팅 수업을 진행할 때, 카피라이터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를 ‘지성인’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전 04화 그 엘리베이터는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