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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카피 Oct 22. 2023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포지셔닝은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광고전략으로 모든 광고 전략 중에서도 핵심을 꿰뚫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어 전략의 꽃으로 불린다. 포지셔닝은 말 그대로 제품의 위치를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 제품을 중심으로 제품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중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소비자 마음 속에 빈자리를 찾아내어 바로 그 자리에 제품을 위치시킨다.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의『포지셔닝』은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지각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대상을 판단하여 머릿속에 위치시키는 모든 과정을 ‘mind의 작은 사다리’로 표현하며 현재 제품의 포지션을 확인하고, 앞으로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를 철저하게 소비자의 mind에서 찾아낸다. 그래서 업계 리더일 때, 혹은 추격자일 때 포지셔닝이 다르고, 경쟁 상대를 염두해 두었을 때 포지셔닝이 달라야 한다.


  포지셔닝이 전략의 꽃인 이유는 강력한 핵심 메시지를 개발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이 전략 속에 진실에 대한 깊은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광고 크리에이티브 작업을 하다 보면, 흔히 크리에이터는 광고주의 눈으로 제품을 바라보기 십상이다. 광고해야 할 제품에 애착을 지니고 그 제품을 분석하고 연구하다 보면, 타제품과 다른 작은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마치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발견을 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품 중심의 관점과 태도는 소비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크리에이터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공급 과잉의 시대’에서는 무조건 소비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광고해야 할 우리의 제품을 타 제품과의 차이점으로 소비자에게 인식시키고자 할때, 그 차이를 소비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먼저 고려해 봐야 한다. 소비자가 그 차이를 크게 느끼면 그것은 차별화된 컨셉이 될 만한 강력한 핵심 메시지가 될 수 있고, 소비자가 느끼는 차이가 적을 때, 즉 변별력이 떨어진다면 망설임 없이 그 특성은 버려야 한다.


  동일한 특성을 두고 생산자 혹은 광고주의 관점과 소비자의 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 관점의 차이가 제품에 대한 ‘진실’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포지셔닝이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포지셔닝이라는 것 자체가 타인의 마인드를 조정하는 것이기에 철저하게 외부의 시선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진실’ 역시 마찬가지다. 광고에서는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 즉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한다.


  가령, ‘나는 천부적으로 뛰어난 미술적 재능이 있는데, 시대가 이것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면,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미술가’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재 ‘나’의 ‘진실’이다.


  그렇다면, 진짜 ‘진실’은 무엇일까? 자신의 시대를 지나서야 뒤늦게 인정받는 미술가들을 우리들은 많이 목격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미술가가 살았던 동시대의 현실 속에서 그는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의 미술가였다는 것만은 진실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안에서 ‘나’에 대한 진실은 나만 아는 ‘나’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세속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아니, 전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이 층위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는 책의 한 Chapter를 <자기 자신과 경력의 포지셔닝>으로 할애하며 포지셔닝 전략이 단지 광고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포지셔닝은 사람의 인식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우리가 흔히 ‘진실’이라 말하는 것이 어떻게 결정되는 지를 설명하는 논리적 명제라고 감히 칭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들 스스로도 이것이 광고만을 위한 전략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들이 흔히 하는 모든 실수는 주관적인 판단에서 비롯된다. 이 주관적인 관점이 바로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관점과 같다. ‘나’에 대한 판단까지도 객관성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나아갈 바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관점의 우월한 지점이다. 나를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현실 속에서 좀 더 진보된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한 존재를 명확하게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내 현 위치를 파악하고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설정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있다. 객관화, 즉 관점의 전환을 통한 시선의 변주 능력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포지셔닝 전략에서처럼 바깥에서 안을 바라보는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이때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가치판단을 중지하는 일이다.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은데 그런 재능이 없구나.'라든가, '이렇게 되고자 하는데 애초에 바탕이 마련이 안되는구나.' 등의 개선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자기 비하 혹은 자책 등의 감정적 대응을 중지하라는 말이다. 이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대전제는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야만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지점이 어디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벅찬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장욱진 화가의 화첩을 보다가, 그가 남긴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


“꾸준하게 추구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그것을 배우고, 괴로워하면서 배우고, 그 괴로움에 지침이 없이 그 괴로움에 감사하는데 예술가의 생활은 충만하리라 믿는다.”


 비단, 예술가의 삶뿐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고자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 모두는 꾸준히 자신의 일상을 살면서 그 속에서 ‘자기다움’을 찾고자 열망한다. ‘자기다움’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배우고, 괴로워하고, 또 배우고, 그 괴로움에 지치지 않고 그 괴로움에 감사하며 살아나갈 때, 그 삶은 어느덧 충만해질 것이리라. 나아가, 릴케의 말처럼 그 사람은 이미 ‘자기다움’ 안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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