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는 세 분의 스승이 있다. 그중 한 분이 어느날 갑자기 질문을 하셨다.
"자네, 정확히 하는 일이 무엇인가?"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잠깐 멍해졌다가
"아, 카피라이터니까 광고 문안을 쓰는 일을 하죠."
그러다가 내가 하는 다양한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프리랜서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내가 해온 수많은 일들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정작 제안서 쓰기였다. 물론 제안서는 내가 쓴 카피를 설득시키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그런데 카피 한 줄을 쓰기 위한 기획을 하고 전략을 짜는 일과 실질적인 카피라이팅을 하는 일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획과 전략이 훨씬 중요하다는 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보니까 전통적인 광고의 범주에 드는 일 이외에 대중에게 무언가를 알리는 성격을 지닌 모든 글쓰기를 하고 있긴 해요. 그래서 이 일이 기획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실제로 나는 라디오, 동영상, 인쇄 광고에 대한 기획과 카피라이팅도 하지만, 에디토리얼식의 광고성 기사문, 북칼럼니스트로서 신간 소개, 새로 출간하는 책의 제목이나 부제를 정하는 일, 프리 에디터로서 기획 기사를 작성하는 일, 새로 개발하는 제품에 대한 브랜드 네이밍 작업, 책 편집자로서의 일, 팝업 스토어의 전시 스토리텔링, 홍보 영상의 시나리오 작성, 기업의 Brochure, Annual Report 또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Sustainability Report 기획 및 원고 작성까지 상업적 목적을 위한 홍보성 글쓰기에 해당하는 모든 일을 다루고 있다. 이런 일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그래서 기획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해서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셨다.
"그게, 자네가 문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네."
"아뇨, 선생님, 제가 일을 해보니까 문장력보다 기획력이 정말 중요해요. 컨셉을 정하는 일이요."라고 다시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은
"그러니까. 그게 문장력이 뒷받침이 되니까 가능한 거네."라고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다.
그 순간 그간 내가 내 일에 대해 그려왔던 왔던 이미지의 구조가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큰 줄기라고 여겼던 기획력이 사실은 문장력, 즉 글을 짓는 능력이라는 더 큰 줄기 안에 속하는 것이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보면,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카피라이터'라는 호칭보다 더 많이 듣게 된다. 왜 그들이 나를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인식하는지, 어째서 선생님이 '기획력'보다 '문장력'에 무게를 더 두시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내가 하는 일은 문장을 다루는 일이고, '글'을 통해 생각하고, 말하고, 메시지를 전달하여, 타깃 소비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일이다. 왜 이 간단한 본질을 몰랐던 걸까? 그것은 내가 일을 하면서 늘 '기획'이나 '전략', '컨셉 도출'에 집중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내가 문장력이라는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일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문장력이다. 기획력, 컨셉화 능력은 그 이후의 문제다. 내가 20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기획력과 컨셉화 능력을 키우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문장력이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주마등처럼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거의 매일 신문의 좋은 칼럼들을 찾아 읽고 필사를 했던 일, 영화를 보고 나서 꼭 나름의 별점을 매기고, 10줄 영화평과 영화 리뷰를 각각 작성했던 일, 매일 일기를 쓰고 책을 읽으면 꼬박꼬박 리뷰를 작성했던 일, 마지막으로 쉬지 않고 책을 읽고 그 의미를 되묻곤 했던 일. 이런 글쓰기 습관이 결국 문장을 익숙하게 느끼게 했고, 문장을 다루는 일에 호감을 갖게 했으며, 목적에 따라 문장과 글이 어떤 다른 방향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앎을 장착시키지 않았을까.
결국은 문장력인데, 한 층 더 깊숙하게 들어가 일반화를 시켜보면, 결국은 개인의 노력이다.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에 지속적이고 일관된 정성과 시간을 쏟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 나가고자 하는 모두에게 그 무엇보다 중대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