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소녀
황순원 원작의 영화 ‘소나기’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교실에서였다. 당시 교육청 주관으로 농촌 학교들을 순회하면서 소나기 영화를 상영했는데, 강당에 암막을 치고 몇 개 학급씩 돌아가며 이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우리 앞에서 영화를 본 아이들이 암막을 걷고 나오는데 다들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영화를 보려고 강당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 반 친구들도 다들 긴장하며 아이들에게 왜 우냐고 묻기도 했다. 암막을 통과해 강당으로 들어갈 때 느꼈던 설렘과 낮에 만들어진 어둠이 주는 눅눅함과 아늑함도 기억이 난다.
당시 안 그래도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오랫동안 우울 모드를 유지했던 것 같다. 덤덤하게 소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어제와 똑 같이 일상을 대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울컥했던 것 같다. 하도 오버를 해서 선생님께 한 소리 들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격렬한 감정의 파도나 억지로 감동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하게 이어지는 연출은 자연스럽게 슬픔이 흘러가게 만들었다. 이때 느꼈던 잔잔하지만 깊은 슬픔이 현재까지도 마치 추억처럼 뇌리에 침전되어 있다. 아마도 나와 동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많은 아줌마 아저씨들도 이 이야기의 기억을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느 하나를 만나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어이해
그 하나 떠나고 나만 그대를 기다리나
가슴속에 슬픔을 안고.
- 안개 걷히는 날, 신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