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23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집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도중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길래 받았다.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 나는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 보니 가끔 이렇게 전화로 불쑥 연락이 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작업 의뢰 전화인 줄 알았다. 마사지샵이란다. 그래. 마사지샵 전단지도 만들 수 있지. 내 이름을 말했다. 어디에 내가 적어놨던가. 근데 내용이 영 이상항 방향으로 흘렀다. 자기네 마사지샵 사정이 안 좋아져서 시시티브이를 설치했는데 내가 며칠 전 거기에 방문했다가 그쪽 업소 여성을 성추행하네 마네 하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나는 뭘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전화를 끊었다.
제가 마사지업소에 가서 도우미를 불렀다고 했다. 제가요? 살면서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없다. 마사지라면 최근 대만에서 받은 발 마사지가 전부인데 심지어 거기서도 나는 그 수많은 마사지사들 중에 굳이 손님이 많아서 주인아주머니가 마사지해줬다. 코스가 어깨 마사지 후 발 마사지였는데 어깨 마사지 과정을 주인아주머니가 해줬다. 마사지를 받으며 끝도 없이 중국말로 다른 마사지사에게 고래고래 지시를 내렸지. 같은 돈 내고 조금 아쉬웠다. 다행히 발 마사지는 현역 마사지사가 해줬다. 어쨌건 나에게 마사지는 그것뿐인데.
그런 업소에 갈 깜냥도 안돼요. 요 며칠 외출도 거의 안 했다고. 미세먼지도 안 좋다 그래서 운동도 밖으로 안 가고 아파트 헬스장 갔어요. 그런 내가 무슨 마사지샵을 가겠다고. 갈 돈도 없어. 요즘 라면 자주 먹는데 거기 갈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겠어요.
말하는 도중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통화 초반에 광고를 맡기려는 건 아니라는 둥의 말을 한 걸로 보아 아마 내 블로그를 보고 연락한 듯하다. 기막혀.
당황해서 전화에 대해 무슨 소리하는거냐 다시 묻지는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그것도 잘한 일은 듯하다. 요즘 남의 목소리 베끼는 게 워낙 쉬운 일이니 먹잇감을 던져주지 않을 필요가 있다.
아무튼 전화를 끊고 한참 황당해하다 녹음된 통화내용을 다시 들어봤다. 나는 의심병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통화가 걸려오면 녹음이 되도록 설정을 해놓은 터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내 나이또래의 남자 목소리. 딱히 외국인스럽지는 않았다. 근데 다시 들어보니 목소리가 정말.... 의무적이다. 매너리즘 그 자체. 수십, 수백 통의 똑같은 피싱을 시도하는 사람만이 가지는 무미건조함. 그래. 그렇게 전화를 돌리다 보면 며칠 전 마사지 샵을 방문했다가 도우미 여성을 부르고 성추행까지 한 인간이 아뿔싸 걸려들 수도 있겠지. 이 전화기 건너편 보이스피싱범이 그 우연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이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면 이 남자는 어떻게 했을까. 전화를 끊었을까. 아님 소리를 질렀을까. 전화를 끊었을 것에 더 무게가 실린다. 왜냐면 빨리 다음 전화를 걸어야 하니까. 그것도 일이라고 자기도 안될 놈은 빨리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겠지.
오랜만에 걸려온 보이스피싱 전화가 어이없으면서도 누군가는 이러고 사는구나 싶기도 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