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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슨금 Aug 14. 2023

영국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됩니다! 조심하세요!

GBBF(Great British Beer Festival) 날짜를 캘린더에 잘못 적었다. 같은 날에 Smoke & Fire Festival을 이미 예약했다. 이 사실을 행사 하루 전날에 알아차렸다. GBBF가 다음주가 아니라 이번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입장료를 날리고 'London Historic Pubs Talk & Tasting' 강연에도 참여할 수 없을 테니 그래도 미리 알아서 다행이라며 위안했다.(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강연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Smoke & Fire Festival에서 먹은 바베큐

문제는 두 행사 모두 환불이나 날짜 변경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무리해서 하루에 두 행사를 모두 가기로 했다. Smoke & Fire Festival은 런던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Ascot 경마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라 빠르게 구경하고 다시 런던 시내로 돌아와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날은 폭우가 쏟아졌다. 강연 시작 시간은 오후 2시 30분이었고, 페스티벌을 더 즐기고 싶었으나 기차가 1시간에 1대밖에 다니지 않는 외진 시골동네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빨리 역으로 가야 했다. 맛있는 바비큐 음식을 먹은 직후라 배는 부르지, 비는 세차게 오지, 그럼에도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겨우 역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주머니에 핸드폰이 없는 거다?! 핸드폰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말이야. 전화번호도 사진도 예매한 티켓들도 다 거기에 있는데. 핸드폰이라는 작은 기계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무력감이 들었다. 여러 가지로 자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행사 날짜를 착각해서 중복으로 잡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오전에 앉은 자세에서 주머니에서 폰이 떨어져서 모르는 분이 주워줬었는데, 그때부터라도 조심했으면 잃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행사장을 뜨기 전 앉았던 테이블 아래 떨어져 있지 않을까 싶어 얼른 돌아가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그사이 누가 집어간 건가 하는 의심도 밀려왔다.


남편이 그사이 계속 내 핸드폰 번호를 전화를 걸고 있었는데, 웬걸 누가 전화를 받았다고 하는 거다! 내 핸드폰이 도보에 떨어져 화면이 켜져 진동이 울리는 걸 받아준 선량한 행인이 있었다. 알고 보니, 정신없이 뛰던 사이 열려 있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쏙 빠져버렸던 거다. 세상에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구나, 찾아서 직접 갖다 준 그 여자분께 너무나도 감사했다. 비까지 쫄딱 맞으며 일부러 챙겨다 주다니!(영국 사람들은 비바람이 불어도 우산을 잘 안 쓴다.)


꼼짝없이 강연에는 거의 끝날 시간즈음 도착했다. 가는 기차에서 '이만저만 사정으로 강연에 늦어 죄송하다, 시음 맥주라도 먹을 수 있게 따로 챙겨놔 줄 수 있으시냐'라고 주최 측에 인스타그램 DM 메시지를 보냈다. 영국은 워낙 일처리가 느린 나라라 보내놓고도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긍정적인 답장이 왔다. 오히려 늦게 간 덕분에 정량보다 많이 남은 시음맥주들을 마실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난 강연자분이 우리가 영국 펍, 사이다(사과주)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이자 알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독대로 맥주 한 잔 함께 하면서 더 값진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행사장에서 사이다 한잔씩 얻어먹기까지 했다.

남편과 나, 강연자 분


내 핸드폰은 다행히도 돌아왔는데, 이번엔 또 남편 핸드폰이 말썽이다. 남편이 우산을 쓰지 않고 핸드폰을 비를 맞히며 사용하다 보니 몇 시간 뒤에 아이폰이 벽돌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침수 문제였을 거다. 집에 와서도 아이폰 벽돌 어떻게 해결하지, 영국 타지에서 어떻게 망가진 걸 고치지, 새 폰을 사야 하나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오래 충전하다 보면 해결되기도 한다는 인터넷 게시글을 보고 희망을 걸었다. 일단 충전해 두고 내일 해결해 보자며 걱정을 안고 선잠에 들었다. 꼭두새벽에도 알람음이 어찌나 선명하게 들리던지! 아이폰이 켜졌고 벽돌에서 풀렸다. 다행이다.



마치 풀기 어려운 실타래처럼 꼬일 대로 꼬여버린 하루였다. 나는 매번 서두르거나 급한 상황에서 덜렁거려 중요한 걸 놓치거나 일을 그르치는 경향이 있다. 빨리 해야 하는 상황일수록 더 천천히, 침착하게 해야 하는데 말이야. 고쳐먹어야 하는 성격 중 하나다. 핸드폰을 되찾지 못했더라면 하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다. 너무나도 번거롭고 힘든 절차와 많은 비용이 예상된다. 이번 경험을 한 덕에 앞으로 더욱 소지품 간수에 조심하려고 한다. 오늘 일이 없었더라면 정말 도둑이 훔쳐갈 상황이 생길지도 몰라, 미리 액땜한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분께 친절과 도움을 받아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떨어진 폰을 주워준 남자분, 뛰다가 길에 떨어뜨린 폰을 주워준 여자분, 흔쾌히 강연에 늦게 도착해도 시음할 수 있게 도와준 관계자분, 강연시간이 끝났음에도 우리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 준 강연자분까지. 누구보다 난감한 상황에서 발 벗고 뛰어다니며 도와준 남편이 없었더라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두 감사하다. 나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생기면 소극적으로 방관하지 말고 내가 받은 친절을 베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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