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정원 한 가운데 앉아있었다. 나로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빛깔과 다양한 모양의 꽃들이 한 가득 피어있는 정원이다. 화려한 꽃들 사이에, 그 꽃들만큼이나 어여쁜 소녀가 오도카니 앉아있다. 나는 자연스레 소녀에게 다가간다. 소녀도 방긋 웃으며 내게 곁자리를 내준다. 가까이서 본 소녀는 여리고 가냘프다. 길고 미끈한 목덜미가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살포시 미소 지으면 드러나는 깨끗하고 가지런한 치아가 인상적이다. 소녀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나 역시 소녀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소녀는 즐거운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즐거워졌다. 이렇게 즐거운 기분이 든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기다렸어요. 내 안에는 항상 말들이 가득 차 있었거든요. 때로는 너무 꽉 차올라서, 목구멍이 아플 지경이었어요. 하지만 한 번도 시원하게 내뱉은 적은 없어요.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기껏 힘들게 말을 꺼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그건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슬프잖아요. 그런 기분, 혹시 아세요?
알 것 같다. 소녀가 말하는 그 슬픔이 무엇인지. 나 역시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뱉기보다는 담아둘 때가 더 많기에. 나는 진심을 담아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을 잇는다.
-우리 부모님은 성실하고 좋은 분들이에요. 다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에는 많이 바쁘고, 많이 지쳐계셨지요. 지금은 이해해요. 사는 게 워낙 녹록치 않은 거잖아요.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늘 내일을 위해 사셨으니까, 나에게 눈 돌리지 못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에게 오늘은 내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거장이었어요. 보통, 목적지가 아니라 그냥 거치는 정거장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도 나와 내 동생이 어렸을 때는 조금 여유가 있었던지 가끔이지만 하루 종일 우리와 시간을 보내시는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커가고 들어가야 할 돈도, 내야 할 돈도 많아지면서 부모님은 점점 더 내일만 생각하며 오늘을 보냈어요. 내일 내야할 공과금, 다음 달에 들어갈 학원비, 내후년에 마련해야 할 대학 등록금이 부모님을 자꾸 내몰았어요.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었을 거예요.
소녀는 다 이해한다는 듯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소녀가 너무나 기특해서 꼭 껴안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소녀는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혀를 쏙 내민다.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착한 애 같아서 민망하네. 사실 나, 착한 거랑은 거리가 멀어요. 굳이 따지자면 못된 쪽이랄까. 주변 사람들한테 상처도 많이 주고. 어렸을 때는 평범했는데요, 중학교 가면서부터 평범한 게 싫더라고요. 나와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칠 새 없이 바쁘기만 한 부모님도 싫었고, 손 귀한 집 장손이라고 남동생만 예뻐하는 할머니도 싫었어요. 할머니를 등에 업고 저 하고 싶은 짓 다 하는 남동생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밖으로 나갔어요. 밖에 나가면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어요. 굳이 어렵거나 힘든 일이 없어도 삶에 대한 불만과 짜증만큼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그런 애들이요. 그 애들과 같이 몰려다니면서 이 얘기 저 얘기 실컷 수다를 떨다보면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어요. 하지만 그건 그때 잠시 뿐, 말은 또 금세 차올랐어요. 내뱉어지지 못한 말들이 쌓여갈수록 나는 점점 더 화가 났고, 점점 더 세상이 싫어졌어요. 때때로 나는 왜 가난하지 않은지, 우리 부모님은 왜 멀쩡히 살아 계신지, 우리 가족은 왜 깨어지지 않았는지, 왜 내게는 눈에 보이는 불행이 없는지 원망했어요. 불행해도 될 이유가 하나만 있었어도 세상을 마음껏 저주할 수 있을 텐데, 라며 아쉬워했죠. 내 안의 화를 정당하게 풀어놓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불행을 기다렸던 거예요.
소녀의 말끝이 살짝 떨렸다. 나는 앉은 자리 옆에 싱싱하게 돋은 푸른빛 잔디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었다. 구부리고 있던 오른쪽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잔디를 쓸던 손으로 저린 다리를 주무른다. 소녀는 그런 나를 보고 살짝 미소 짓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은 쉽사리 오지 않았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 부모님은 성실하고 좋은 분들이시거든요. 그래서 나는 스스로 불행의 원인이 되기로 했어요. 학교에서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죠. 가끔 담배도 피고 술도 마셨어요. 내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반항은 딱 그 정도였어요. 그러다, 그 일이 터진 거예요.
소녀의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는다. 아주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리듯, 멍해진 얼굴이다.
-유난히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친구랑 둘이서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거기서 그 애들을 만났어요. 남자애 셋에 여자애 하나. 거기에 우리 둘이 더해지면 짝이 맞는다며 함께 놀자고 했죠. 묵을 방도 있고 마실 술도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어요. 모래사장 위에 모닥불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폭죽도 터뜨리며 놀다가 방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여섯 명이 다닥다닥, 서로 어깨를 맞대고 무릎을 부딪치지 않으면 앉기 힘들만큼 작은 방이었지만 이미 다들 취한 상태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죠. 방에서도 술을 마셨어요. 빈 술병이 늘어날수록 남자애들은 자꾸 여자애 쪽으로 몸이 기울었고, 여자애들은 자꾸 다리가 풀렸어요. 내 옆에 있던 남자애도 나한테 어깨동무를 하고 잔뜩 몸을 기댔어요. 그 아이의 손이 가슴께를 계속 스쳤는데, 그게 싫은지 좋은지 알 수가 없었어요. 다른 애들도 다 그러고 있으니까 나 역시 가만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친구가 소리를 질렀어요. 그만 두라고, 짜증난다고. 곁에 있던 남자애의 손이 친구의 치마 속을 억지로 파고들던 참이었지요. 하지만 남자애는 아랑곳없이 친구의 다리를 벌리려 들었고, 다른 애들은 낄낄대며 그 모습을 보기만 했어요. 나도 그랬어요. 술에 취해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분위기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거든요. 다른 남자애 하나가 친구의 팔을 잡아 눌렀고, 마침내 친구의 다리를 벌리는 데 성공한 남자애는 제 바지와 속옷을 무릎까지 끌어내리고 친구 위에 엎어져 한참을 끙끙댔어요. 그동안 친구는 계속 소리를 질렀어요. 나를 바라보며 도와줘, 도와줘, 라고 외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난 가만히 있었어요. 내게 어깨동무를 한 남자애의 손을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도 있었겠지만, 무서웠어요. 나도 친구와 똑같은 짓을 당할까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었어요. 다른 애들이 낄낄거리는 것과 똑같이 낄낄댔어요.
소녀는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뽀얀 앙가슴이 크게 한번 오르내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소녀의 앙가슴에 시선을 빼앗긴다.
-남자애가 친구에게서 떨어지고 난 뒤, 친구는 몸을 떨며 울었어요. 울면서 다 죽여 버린다고, 다 신고할 거라고, 다 감방에 처넣을 거라고 소리쳤어요.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여자애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지랄한다, 걸레 같은 게, 라고 했어요. 그리고 친구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신고해보라고, 네깟 게 그럴 배짱이나 있겠냐며 뺨을 치고 배를 걷어차고 다리를 짓밟았어요.
소녀의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또 한 번, 소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모르고 나는 아는 사실이 하나 있었어요. 그건 친구가 간질병이 있다는 거였죠. 어릴 때 오토바이와 부딪친 적이 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그 이후로 발작을 해서 약을 먹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친구가 처음 말해준 비밀이었어요. 그날 그 방에서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나는 친구가 그 짓을 당하고 얻어맞고 마침내 발작을 일으켜서 거품을 물며 숨이 넘어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보고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곳에서 가장 큰 죄인은 친구를 덮친 남자애도, 친구를 때려서 발작에 이르게 한 여자애도 아닌 바로 나였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방치한 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불행을 초래한 나. 내가 친구를 죽인 거예요.
긴 한숨 끝, 소녀의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은 듯 축축하다.
-말은 삽시간에 퍼졌고, 나는 친구의 부모님과 선생님과 또 다른 여러 친구들 앞에서 죄인이 되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했어요. 나는 이미 부모님이 알고 있던 자신들의 딸과 너무도 달랐거든요.
-내게 찍힌 주홍의 글씨는 너무 크고 또렷해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아무도 나에게 대놓고 손가락질하지 않았지만 대신 귓가에 친구의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죠. 도와줘, 도와줘. 그 소리가 듣기 괴로워서 귀를 틀어막으면 또 다른 소리가 뇌 속을 파고들었어요.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어요. 그래, 어쩌면 죽어서 이 죄를 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이미 사라진 친구는 나를 죽일 수 없었고, 나는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또 다시 간절히 기다리기 시작했어요. 나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누군가를, 나에게 속죄를 안겨줄 구원자를.
소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한없이 맑고 투명한 눈동자.
-그리고 당신이 내게 온 거예요.
소녀는 방긋 웃었다. 소녀의 하얀 목덜미 위로, 붉은 손자국이 스미듯 천천히 떠오른다.
-참 다행이에요. 나를 죽인 게 당신이어서. 다른 무고한 누군가가 운명의 장난에 걸려 나를 죽일 사람으로 선택됐다면, 그 사람은 또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어야 할 텐데. 죽음을 간절히 기다린 건 나인데 그런 나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죗값을 치르거나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얼마나 미안할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실수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고 자신이 원해서 나를 죽여주다니. 차마 말을 전할 시간은 없었지만, 그래서 고마웠어요. 당신한테.
소녀의 얼굴이 점점 더 파리해진다. 정원의 꽃들도 말라간다. 깔고 앉은 잔디가 누렇게 죽어간다. 오른쪽 다리의 저림은 점점 더 심해진다.
-고맙기는 했어도 나, 아까 말했듯이 착한 애는 아니거든요. 기껏 죽음으로 속죄했는데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까맣게 모르는 건 싫더라고요. 나만 알면 그게 어디 속죄인가요. 남들이 알아줘야지. 그러니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아무도 모르게 버려지는 것은 싫어요.
소녀가 또 다시 방긋 웃는다. 가지런한 치아가 곱다.
-그리고 당신 손에 이렇게 죽는 건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해서.
소녀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다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저려온다.
-잘 가요.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귀를 찢는 경적에 눈을 뜬다. 간신히 고개를 드니 차 앞 보닛이 가로수에 부딪쳐 심하게 찌그러진 모습이 보인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폼이, 금방이라도 불길이 솟구칠 듯하다.
구겨진 차문을 열고 가까스로 몸을 바깥으로 빼낸다.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듯 덜걱거려 걸을 수가 없다. 주변에 웅성거림이 높아진다. 한밤중이지만 인적이 드물지 않은 도로였다. 이미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다리를 질질 끌고 트렁크로 기듯이 다가간다. 달칵, 트렁크를 연다. 소녀의 텅 빈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기묘하게 꺾인 팔다리가 마리오네트를 연상시킨다. 일그러진 입매가 웃는 듯 보인다. 사이렌 소리가 비명처럼 울리며 점점 가까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