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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초 Apr 25. 2022

'예비 워킹맘'으로 살면서 알게 된 것들

나는 생계형 워킹맘입니다 16

워킹맘으로서의 삶을 글로 풀다보니 문득 아기를 임신하고 있을 때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사실 복받은 체질과 여러가지 좋은 조건으로 나는 임신초기만 해도 일을 하는 게 그리 힘든 줄 몰랐었다. 우리 업종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딱 정해져있지 않아 '러시 아워'시간을 피해 좀 일찍 나오거나 좀 늦게 나오면 버스, 지하철에서도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극초기에는 비용을 감수하고 택시를 탔다. 입덧도 심하지 않아서 오히려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으면 컨디션이 더 나은 것 같았다.


문제는 다른 것들이었다. 임신 전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임신 후에는 피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였다. 새삼 우리 직장인의 삶이 얼마나 해로운 것들로 가득한지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최소 안정기인 16주는 넘기고 회사에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 처음엔 나도 그때쯤 오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다니기란 쉽지 않았다. 입덧을 거의 하지 않은 나조차도 이 정도니 심한 사람들은 가히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다.

직업상 점심 자리에서조차 사람들을 만나 반주를 곁들이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하필 부서장을 모시고 다니는 일정이 빼곡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술을 거절하기도 난감했다. 처음에야 치과 치료를 해서, 한약을 먹고 있어서, 속이 안 좋아서 등등의 이유를 댔지만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결국 제발질린 나는 부서장에게 면담요청을 했고 임신 8주때 '혹시 모르니 다른 직원들에게는 말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양해를 구했다. 당시 부서장은 대놓고 "아니 결혼하자마자 임신하면 어쩌려고 그래"같은 소리를 하진 않았지만 딱히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막 축하할 만한 일은 아니어서 그런가, 그래도 내가 퇴사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너무 뜻밖의 건조한 반응이 당황스러웠던 건 사실이었다.


하필 그땐 여름이어서 왜 그렇게 식사메뉴는 회가 많은지. 나를 담당했던 산부인과 원장님은 굉장히 쿨한 분이셨다. 다른건 다 먹어도 좋다고 하셨지만 유독 그 쿨하신 분이 날것만큼은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길래 나도 철썩같이 그 말씀을 따랐다. 뭐 0.1%의 확률이라도 나한테 일어나면 100%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술도 안 먹고 회도 안 먹으니 스끼다시밖에 먹을 건 없었지만 이런건 뭐 아무래도 괜찮았다.


Pavel Danilyuk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가장 싫었던 건 출퇴근길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담배 연기였다. 여기저기 흡연금지구역이라는 푯말이 무용지물일 정도로 왠만한 오피스촌 골목길에는 꼭 '담배 무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전에는 그냥 냄새가 싫고, 거리에 뱉는 침이 더럽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임신을 하니 목숨걸고 피해야 하는 공포의 대상이 됐다. 더군다나 그때는 마스크도 안쓰고 다니던 시절이라, 혹시나 아기에게 피해가 갈까봐 입과 코를 막고 재빠르게 도망다니곤 했다.


임산부 최대의 적인 스트레스도 직장을 다니니 피할 길이 없었다. 최대한 심호흡과 명상을 하며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 노력했지만, 원체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이다보니 신경쓰이는 일이 있으면 뱃속 아이의 태동이 잦아들었다. 그러면 또 그걸로 신경쓰여서 스트레스를 받고...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그냥 망설이지 말고 퇴사해도 좋다고 했지만 몇달만 더 버티면 수당 받으면서 정당하게 '쉴 수(?)'있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기다리고 있는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제 와서 퇴사해버리면 당연히 금전적으론 손실이었다. 게다가 빠듯한 살림이다보니 말처럼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출산휴가가 시작되기 몇 달 전 회사는 내 자리를 대신할 후임자를 뽑았다. 그리고 인수인계는 오롯이 내 몫이 됐다. 이미 홀몸이 아닌 나는 가르쳐야 하는 동료 직원을 데리고 다니며 내 업무와 함께 가르치기까지 했다. 뱃속 아기까지 '세 명'이 한 셋트로 다니는 셈이었다. 당시 7년차가 되도록 어쩌다보니 막내 생활만 계속해온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내 일을 그냥 하는 것보다 가르치는 게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걸 그냥 관성적으로 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설명하고 이를 현장에 적용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금까지 나를 가르쳐 준 모든 교사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내가 하는 분야의 업무가 처음이었던 후임자분은 수시로 나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고 수시로 내 배 밑은 뻐근하게 뭉치고 당겼다.


점점 무거워지는 배에 이제는 조금만 걸어도 골반과 허리가 마구 당겼다. 사실 그 때 안 좋아진 골반은 아직까지도 고질병으로 남아 있다. 수백만원 도수치료도 소용이 없다니 정말 임출육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어쨌거나 산부인과 검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배뭉침은 좋지 않다며 원한다면 소견서를 써 준다고 했다. 병원에서 받은 소견서를 만지작거리며 회사에 출산휴가 전 '병가'를 낼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오늘은 말해야지, 아니 부서장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니 내일 말해야겠다, 내일 말할까..조금만 더 참으면 휴가 들어가는데, 오늘은 금요일이니 월요일에 출근하면 말해야겠다. 하다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갔다.


급기야 출퇴근조차 버거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겨울이 되니 땅이 얼어서 넘어지기까지 했다. 망설이던 나는 부서장 면담을 했다. 부서장은 많이 힘들었냐면서 그럼 일은 재택으로 하고 후임자도 많이 익숙해졌으니 나눠서 하라고 했다. 알고보니 당시 부서장 역시 사모님이 젊을 적 유산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일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부담이 많이 줄었다. 그렇게 한 달을 더 버틴 후 그리도 기다리던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한 달간의 출산휴가 기간은 아직까지도 꼽히는 가장 달콤한 시간이었다. 일을 쉬니 신기하게 배뭉침이나 태동이 줄어드는 일도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부담 없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먹고싶은 걸 먹고 집에서 산전요가를 하거나 가끔 산부인과에서 열리는 산모교실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남편이 퇴근하면 태교동화를 읽으면서 깔깔거리다 잠자리에 들었다. 임산부니까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됐고 집안일도 거의 놨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쉽지만은 않은 임신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모로 행운이 따랐던 편이다. 임신 기간 내내 아기와 나의 건강, 생명을 위협하는 큰 이벤트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이나 임산부 커뮤니티를 보면 생각보다 많은 확률로 임신 중의 여러 이벤트로 인해 타의로 일을 접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입덧이 너무 심해 업무는 커녕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입원을 하거나, 유산위험이 있거나, 임신 후기에 매우 높은 확률로 발생하는 조산 위험 등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출산휴가 전까지 무사히 직장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는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매번 새롭게 깨달았다. 단언컨대 아이와 함께하는 삶은 매일이 기적이고 평범함이 가장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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