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는 왜 핀란드에 오게 됐을까
벌써 나온지 10년도 더 된 '카모메 식당' 영화를 열 번은 족히 본 것 같다. 자극적인 콘텐츠에 지쳐 뭔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걸 보고 싶은 날, 일상에 찌들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날,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맛있는 음식이 잔뜩 나오는 영상을 멍때리며 보고 싶은 날, 카모메 식당을 틀었다.
올해도 연례 행사처럼 카모메 식당 영화를 보다가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치에는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을 했길래 이역만리 핀란드에서 버젓하게 자신의 식당을 운영하게 될 수 있었을까, 미도리는 왜 눈을 감고 세계지도에서 찍힌 곳에 올 생각을 했을까, 마사코는 어쩌다 핀란드로 오게 됐을까.
책에는 영화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세 여자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영화 장면 중간중간에 나온 '합기도'를 하는 장면도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통해 설명된다.(아버지 이야기는 사치에가 '오니기리'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미도리가 일본에서의 무기력한 삶을 버리고 핀란드로 훌쩍 떠나온 것, 병든 부모 뒷바라지만 20년을 하다가 부모가 돌아가신 뒤 핀란드로 온 마사코의 이야기가 나온다. 힐링 무비, 맛있는 시나몬 롤이 나오는 영화로만 기억됐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달까.
책을 읽으면서 세 여자의 연령대에 눈이 갔다. 사치에는 30대 후반, 미도리는 40대, 마사코는 50대다. 세 여자의 공통점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서기'에 나섰다는 점이다. 20대 후반~30대 초중반인 내 또래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과 비혼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다. 과거처럼 결혼이 필수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여자 혼자 삶을 살아가기에는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이다. 그리고 그 걱정의 중심에는 '지금은 괜찮지만 나이가 들면 혼자의 삶을 더 이상 즐길 수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나 역시 그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않던 터라 세 여자의 홀로서기가 남일같지 않았다. 적령기를 넘겨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건 어떤 모습이 될까. 소설에는 나름대로 그 고충이 '현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동양에서 온 체구 작은 여자들을 노리는 강도, 결혼하지 않은 딸/여자 형제를 애물단지 취급하는 가족들, 안정적인 줄 알았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직장과 돈벌이...아쉬운 건 책에서도 이렇다할 해결책은 없었다는 거다. 사치에는 복권에 당첨된 덕분에 핀란드에 올 수 있었고, 아버지 합기도 도장에 드나들던 핀란드인 수강생 덕분에 우연치 않게 가게를 열 수 있는 비자를 얻을 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합기도 고수였기 때문에 가게에 침입한 악당도 손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 나머지 두 여자도 사치에라는 다소 비현실적일 정도로 좋은 이웃을 핀란드에서 '우연히' 만났기 때문에 일자리부터 숙소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과연 현실에서 홀로서기라는 게 가능하긴 할까, 라는 생각이 들며 도리어 힘이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때 되면 결혼해서 원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남편과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식 낳고 사는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핀란드에서 세 여자가 만나 자연스레 가까워진 것처럼 중년 이후의 삶에도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의 '관계맺기'는 가능하기에 언제나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이가 들면서 처지가 변하며 자연스레 멀어져버린 친구들, 남보다 못하게 된 가족들보다 때론 더 버팀목이 돼 주는 '가까우면서도 지나치게 가깝지 않은' 인간관계의 가능성들이 열려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