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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생활 1년 만에 휴가를 내다

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15

by 뚜벅초

아기를 낳은 지 딱 1년을 며칠 앞둔 날, 드디어 하룻밤의 '휴가'를 냈다. 남편 휴가에 맞춰서 근처 엄마 집에서 1박을 하고 오는 것이다. 엄마는 혼자 살고 계시고 그날은 마침 엄마가 야간근무를 하시는 날이라 집이 비었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교대근무로 이틀에 한 번 집에 오는 남편은 두 번의 휴가를 써서 총 5일을 쉴 수 있어서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나도 휴가를 낼 수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육아에는 주말도, 휴일도 없다. 잠깐씩 아기가 자는 틈을 타 숨 돌리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것도 언제 깰 지 모르기 때문에 반 각성 상태로 지내야 한다. 사실상 거의 24시간 풀가동 상태라고 보면 된다. 아무리 빡센 직장이라도 주말이나 휴가만 생각하며 버티던 걸 떠올리면 정말 세상에 이렇게 힘든 직업이 다 있나 싶은 수준이었다. 어찌보면 육아의 노동량이나 노동강도 자체보다 '쉼'이 없다는 게 엄마들을 더 힘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돌이 다 되도록 '통잠'을 자지 못하는 아기 때문에 나는 취침약 없이는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심한 수면장애가 생겼다. 지금껏 아이를 낳고 조리원 퇴소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아기랑 떨어져서 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집을 떠나는 게 꽤 망설여졌지만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간절했다. 원래 '호캉스'도 생각했지만 코로나의 장기화로 엄마 집이 빌 때잠시 신세지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다.


벼르던 휴가의 날, 엄마는 출근을 하시고 엄마 집으로 함께 왔던 남편과 아기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 남았다. 이게 얼마 만인지! 혼자서 보내는 하룻밤이라니. 당장 TV에 넷플릭스를 재생시키고 집 앞 편의점에서 먹거리를 잔뜩 사 왔다. '알쓰' 답게 1컵짜리 와인과 곁들여 먹을 치즈, 올리브, 살라미와 스낵, 컵파스타를 골랐다. 새삼 1인가구가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년 전 내가 자취하던 때보다도 더 다양한 1인가구용 음식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자취하던 땐 한컵 와인 같은 건 없어서 와인이 먹고 싶은 날도 술이 약한 나는 근처 술 잘 먹는 친구를 소환하지 않으면 사 먹기 부담스러웠다. 왜 '1코노미' 시대에 나는 굳이 가정을 꾸려 사서 고생을 하고 앉았는가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당장은 '응답하라 자취생활' 때로 돌아온 것 같은 시간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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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브런치에 글을 저장시켜 놓았더니 어느덧 새벽 2시가 다 됐다. 이제 푹 잠을 자 볼까?하고 양치를 하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아뿔싸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취침약을 안 먹은 탓인지, 자리가 바뀐 탓인지, 낮에 커피를 마신 탓인지. 결국 아기 없이 푹 자겠다는 계획이 무색하게 나는 그날 새벽 5시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새벽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어렵사리 잠을 청했다.


다음날 9시가 넘어 잠에서 깼고, 이렇게 적게 자서야 하루종일 피곤하겠다 싶어서 괜히 남편한테 미안할 판이었다. 모처럼 휴가까지 썼는데 아기한테 짜증이나 내면 어쩌나 싶어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 얼굴을 보는 순간 평소와는 달리 짜증이 전혀 나지 않고 반갑기만 했다. 아기가 평소 때보다 10배는 귀여워 보였다(평소에 귀엽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잠을 그렇게 설쳤는데도, 평소 아기와 함께 10시간을 잔 날보다도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아기가 저지레를 하고 짜증을 내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것이 휴가의 위력이라니!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그 무엇보다 휴식이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기와 함께하지 않고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밤. 물론 그런 날들을 무작정 늘리자니 남편의 체력도 걱정되고, 딱히 '시터'를 쓸 여력도 되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아기와의 애착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정말 못 견딜 것 같은 날에는, 가끔씩 휴가를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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