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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줄이긴 줄였는데

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17

by 뚜벅초

2020년의 마지막을 며칠 앞둔 날, 추위를 뚫고 그 해 마지막 정신과 진료를 다녀왔다. 한 달이 지나면 아기는 돌이 될 거고, 이때쯤이면 선생님도 약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나름 기대를 품으며 다녀왔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분명히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낮약을 완전히 끊을 자신이 없잖아...'


그렇다. 나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 울고, 덜 화내고, 아이 앞에서 감정의 요동을 다소 컨트롤할 수 있게 됐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낮약으로 처방받은 항불안제를 삼킨 후였다. 약을 며칠간 끊으면 신기할 정도로 우울감이 몰려왔다.


마음을 비우자, 새해에도 정신과 약을 먹게 되어도 괜찮아. 그날은 하필 오전 진료를 하지 않는 날이라 그런지 무려 3시간이나 대기가 이어졌다. 새삼 '코로나 블루'의 심각성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대기실에는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모습의,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제각각 할 일을 하며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모두들 마스크를 쓴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워낙 밀폐된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으려니 조금 겁도 났다. 이전 같으면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여유있게 대기할텐데, 카페 내 취식이 금지됐던 때라 꼼짝없이 대기실에 있어야 했다.


조금 편두통이 생기려던 찰나 내 이름이 드디어 불렸고 한 달만에 선생님을 뵀다. 마음 같아서는 "저 이제 우울하지도 않고 다 괜찮으니까 약 끊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양심상 그러지 못했다. 그냥 전보단 나아졌지만 아직도 약을 먹지 않으면 때때로 우울하고 슬퍼진다, 특히 밤에는 약을 꼭 먹어야 잠을 청할 수 있다고 사실대로 실토했다.


shutterstock_319466408.jpg 출처: 셔터스톡


결국 밤약을 이전의 절반으로 줄인 대신 낮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그나마 컨디션에 따라 조건부로 복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나는 대부분의 날을 낮약 1/2알을 먹으며 지냈던 것 같다. 특별히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한 알을 다 먹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버틸 만하고, 때때로 화가 미친듯이 나고, 때때로 엄마가 되어 버린 내 삶을 후회하기도 하고, 이제 한 사람 분 이상의 몫이 필요한 가정경제를 걱정하기도 했고 남편과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산후우울증'의 탓인가, 아니면 엄마로 산다면 누구나 겪는 것인가? 그러면서 나는 약을 끊지 못하고 계속 애매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여전히 우울할 때도 있고 화도 나는데, 이게 우울증인지 아니면 당연한 감정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물었다. "화나는 감정이 그 상황을 벗어나도 계속되나요?"


아니요. 나는 육아를 하지 않을 땐 더없이 평안하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이와 단 둘이 집에 있는 날은 처음엔 괜찮다가도 우울하고 짜증이 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어쨌든 그 상황이 지나면, 감정이 지속되진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번엔 낮약을 따로 처방받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과제가 남아있었기에, 새로운 약을 처방받았다.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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