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18
아기의 돌이 코앞으로 가까워지면서 요동치던 내 기분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육아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화가 나고 짜증이 솟는 순간은 있었지만, 그 순간을 넘기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진짜 '강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매달 찾아오는 PMS(생리 전 증후군)이었다.
조물주는 어찌도 여자에게 이리 가혹하기만 한지, 임신-출산의 고통을 오롯이 여자에게만 '몰빵'했으면서 심지어 임출을 하지 않는 시기에도 매달 일주일이 넘게 PMS와 생리중의 고통을 겪게 만들어 놓았다. 생리 전 최소 3일, 최장 일주일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힘들었고 생리가 시작되면 이틀 정도는 몸살 기운이 독하게 들었다. 심지어 나는 생리통이 거의 없는 편인데도 그렇다. 나는 실제로 써 본 적도 없고 주변 사람이 쓰는 걸 본 적도 없지만 오죽하면 생리휴가라는 게 있을 정도일까.
당연히 PMS는 육아중에도 똑같이 찾아왔다.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자마자 생리가 시작됐고 수유양이 적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모유수유를 했는데도 예외가 없었다. 아이가 없을 때도 이 기간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최소한의 일정만 소화하고 집에 드러누워 있기 십상이었는데, 갓난아기가 달려 있으니 그야말로 죽을 노릇이었다. 남편이라도 있으면 번갈아가며 아이를 볼 텐데 남편도 출근해 없으면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버텼다. 그리고 그 끝은 꼭 아기에게 짜증을 내고 자괴감에 몸부림치다 잠드는 것이었다.
2021년 첫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가서 나는 상태가 많이 호전됐음을 의사에게 알렸다. 하지만 여전히 생리 전에는 많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내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생리 전에 쓰는 약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기존에 먹던 낮약 대신 PMS용 새로운 낮약을 받게 됐다. 그 약은 생리 전 일정 기간에만 복용하게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들이 평생동안 월경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질병이라는 인식은 막상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자연'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지면서, 그저 참고 이겨내고 대충 민간요법 따위로 버티며 시간이 지나기만 바라는 자연현상 정도로 취급하곤 한다. 마치 여자로 태어난 죄라고 말하는 것처럼, 21세기가 밝은 지 20여년이 지났고 성차별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나마 잘못됐음을 인식하고 있는 시대인데도 월경은 여전히 터부시되고 마땅히 아파야 하는 것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나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PMS를 다스리기 위한 약을 처방받으면서 이를 깨달았다. 아, 생리 하겠네. 힘들겠다. 남편한테 좀 도와달라고 해야지.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약을 먹고 적극적으로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연히 이름이 있는 질병이었고 의약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게 어느 정도 충격이었다.
어쨌든 평상시에는 낮약을 먹지 않고 취침약만 먹고, 생리 열흘 전부터 새로운 약을 복용했다. 다행히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 이전보다 밤에 덜 깨어 내 육아생활도 아주 조금이지만 나아졌다. 화나 짜증을 전혀 안 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낮시간에는 그럭저럭 평화롭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PMS용 약을 먹은 지 3일간 정도는 그리 눈에 띄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흘쯤 될 때였나, 묘하게 기분이 가볍고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날짜로 보면 오히려 축축 처지고 우울해야 할 때인데. 약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평소 같으면 널부러져 한숨만 쉬고 있었을 텐데 아이를 재우고도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나름 긍정적인 일상을 보냈다.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고만 생각했던 PMS도 약으로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참고만 지내야 한다고 했을까, 당연히 참아야 하는 것으로만 여겼을까 하는 것들.
그렇게, 한 달을 또 넘겼다. 극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