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낳으면 알아서 큰다는 거짓말
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14
엄마가 되고 나서 싫어하거나 동의하지 않게 된 말들은 참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가장 동의하기 어려운 말은 바로 '애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낳아라'는 말이었다. 물론, 난임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이 말이 꽤 와닿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나이와 임신 확률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이 말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임신을 고민하는 부부들조차도 흔히 듣는 말이다.
'애는 되도록 빨리 낳으라'는 말은, 소위 '적령기'에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 흔히 듣는 말이다. 이들은 임신 출산으로 급격하게 변할 삶을 걱정하고, 자신이 좋은 양육자가 될 수 있을지 따져 보는 중일수도 있다. 혹은 육아보다 더 중요하게 당장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있으나,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일단 연기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경솔하게 나이를 들먹이며 타인의 중요한 인생 결정을 부추긴다. 게다가 뒤에는 대개 '일단 낳으면 애들은 다 알아서 큰다'거나 '엄마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으니 너무 겁먹지 말라'는 훈계가 따라붙는다. 대체 양육을 뭘로 생각하는 걸까?
출처: 픽사베이
일단, 1년간 주양육자로서 육아를 해 본 결과 아이는 절대로 '알아서 크지 않는다'. 대체 어떤 아이가 알아서 크는지 만약 있다면 데려와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2020년대 기준 아이들은 최소 초등 저학년까지는 부모(혹은 양육자)의 절대적인 관심과 헌신이 없이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나기 어렵다. 어찌 보면 이 말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자신을 헌신적으로 키워낸 부모님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과도 같다. 아무리 예전에는 아이들이 '방치형'으로 컸다고 한들, 정말 부모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고 보나?
'엄마니까 어떻게든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정상적인 정서를 가진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아이들을 성심성의껏 키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엄마들이 기존의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억눌러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 당연히 '저절로', '어찌어찌'된다는 말로 남이 쉽게 강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요즘은 많은 이들이 이미 부모됨의 무게를 알고 있어 충분히 심사숙고하는 분위기가 됐지만, 그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져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라고는 하나 그럼에도 절대 경시해서는 안 되는 게 '부모됨의 무게'라고 생각한다. 임신과 출산은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전히 출산은 개인의 삶을 너무 많이 바꿔 놓으며, 행복이나 보람 이상으로 감내해야 할 고통도 크다. 무엇보다 육아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도 많다. 요즘처럼 아이의 정서적인 측면도 중시하는 시대에는 부모의 불행은 아이의 불행으로 이어지기 쉽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정책들도 대부분 '결혼 장려'내지는 '출산 장려'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아이는 일단 낳기만 하면 어떻게든 알아서 잘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몹시 안일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한다. 정책 입안자들 중 상당수가 실제 주양육자로 살아 본 경험이 적기 때문인걸까. 이미 낳은 후의 아이들을 안심하고 잘 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다들 관심이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출산장려책에도 젊은이들이 차갑게 반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이유는 나 역시 결혼을 막 하고 임신 여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낳는 게 좋다'는 말에 휘둘린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그런 중대사를 남 말에 휩쓸려 결정하고 남 탓을 하냐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아직 삶의 경험치가 적은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그런 확신에 찬 듯한 말들이 너무 크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나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별다른 준비 없이 결혼 2개월 만에 임신을 했고, 그 결과 남편과의 충분한 신혼 생활도, 아이를 키울 만한 기초체력도, 정신적 준비도 (나름대로 임신 기간동안 최대한의 준비를 했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에 아이를 키우면서 더 자책을 했고 심지어 아이를 낳은 내 결정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육아 우울증이었다.
아무튼, 이 글은 애는 어떻게든 빨리 낳으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험자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쓴 글이다. 아직 고민중인 분들에게 약간의 참고가 되길 바라면서. 고민이 길 수록 육아가 반드시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픈 매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든든히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