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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실 줄 몰라요

#2. 아침밥 사냥

by 생쥐양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애인이 없는 나에게 끔찍한, 오늘은 '첫눈 오는 날'이다


이불속에서 안식년을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부엌에서 요란한 도마질 소리가 나를 깨운다


"엄마, 뭐해?"

"....."


스물여섯에 취직도 못한 딸내미 위해 매일같이 아침상 차려주는 엄마는 오늘따라 말이 없다

'아침밥을 챙겨 먹는 아이가 학업성적이 뛰어나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서, 학창 시절 내내 5첩 반상을 준비해주던 그녀인데...

내가 아니라 엄마에게 안식년이 필요한가 보다


조용히 집 밖을 나서려는 나에게 엄마가 묻는다

"내년 시험은 어떨 것 같아?"

"...."

"재희 엄마 알지? 엊그제 딸이 취업했다고 한턱 쏘더라. 머 대단한 거 먹을 줄 알았더니만 고작 갈비탕 한 그릇 사주고서는 무슨 놈의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1년 만에 공무원 시험된 게 그렇게 유세야? 내 참. 너도 이제 3년쯤 한 거면 합격할 때 된 거 아니야?"

"...."


세상에나, 압박면접이 따로 없다

대답할 틈도,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는 엄마의 속풀이가 계속될수록 내 배꼽시계는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이것저것 넣어주며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던 주인이 오늘따라 소식이 없으니 적잖이 화가 났나 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데, 본능이 나를 지배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뜨겁긴 하다


하지만 나도 눈칫밥은 먹고 싶지 않다

비록 엄마한테 밥을 얻어먹고 용돈을 타 쓰며 살고 있지만

지난 3년간 꽃처럼 예쁜 나이에 화장도 안 하고 옷 한 벌 사지 않고 오로지 도서관에 앉아 공부만 했었다

친구도 떠나고 연애도 못했지만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려는 마음 하나로 참고 견뎠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밖으로 나가 아침밥 사냥을 하련다


'휴, 눈도 오고 날씨도 추운데 그냥 엄마 밥이나 먹을걸, 괜히 자존심 세워가지고...'

한숨에 또 한숨을 얹어 두 숨, 세 숨, 내 숨소리가 늘어간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뭐하겠는가

이미 내가 수놓은 눈 길 위 발자국이 셀 수 도 없이 많은데 말이다

그 예쁜 길을 망치지 않으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명언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온 내가

이제 막 문을 연 가게 앞에 섰다


나는 그동안,

터질듯한 책가방 속에 우산까지 챙겨가라는 엄마 말에 비를 피할 수 있었고

남자는 대학교 가서 만나라는 엄마 말에 선생님만 짝사랑하며 공부할 수 있었고

여자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엄마 말에 10대 때부터 내복을 사랑하게 되었고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에 '꿈'이 아닌 '안전한 직장'을 목표로 지금껏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웃으며 문을 활짝 열어준다

"눈이 와서 춥네요. 오늘 첫 손님이시니 아메리카노 공짜입니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에 문자를 보낸다

'엄마, 오늘은 아침밥 대신 커피 한 잔 할게.'

'속 쓰리니 밥 먹고 커피 마시라고? '

'엄마, 그런데 여기 커피는 이상하게 달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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