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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실 줄 몰라요

#4. 바쁜 현대인에게 필요한 짝사랑

by 생쥐양

베토벤의 '운명'이 웅장하게 울린다

워낙에 명곡이라 한 번 들으면 서운하니, 세 번쯤은 들어준 후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내려온다


지금은 새벽 5시,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리는 이 시간대가 3년째 익숙하지가 않다

하지만 문 앞에 써 놓은 '넌 할 수 있어. 나는 널 믿어!' 문구를 보니 아직 합격하지 못한 내 현실이 눈에 들어와

서둘러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려본다


예쁜 옷에 관심이 많고, 옷 잘 입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며, 한 달에 한 번씩 귀걸이를 사대던

풋풋한 대학시절을 보내고

때가 묻지 않은, 정확히 말하면 때가 묻어도 티가나지 않은 '네이비'계열의 옷과

간단한 기초화장, 그렇지만 입술만은 포기 못하는 코랄 계열의 립밤을 바르고

출근 준비를 마친다


내가 상상하는 출근룩과는 거리가 멀지만 고시생 중에서는 나름 '패셔니스타'이기에 당당하게 집 앞을 나서려다 두 달 전에 생일선물로 받은 향수를 뿌려본다


친한 친구가 합격하고 뿌리라며 자기 딴에는 나에 대한 위로와 합격 기원이었겠지만 당장 쓸데도 없고 언제 쓸지도 모르는 향수를 화장실 한편에 놔두며 방향제 역할로 써왔다

엄마는 '냄새 먹는 하마' 보다 낫다며 하루에 두 번씩 뿌려대신다

"화장실에 뿌리면서 왜 엄마가 한 바퀴 도는 건데?"라고 물으면

"아깝잖아"하며 찡긋 웃는 엄마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면서 죄송스럽다


그 아까운 향수, 오늘은 내 몸에 뿌려 직장인 포스 내뿜으며 거리를 걷는다

겨울의 끝자락이라지만 여전히 바람은 차고 코 끝은 시리다

하지만 겨울바람 냄새가 왜 이리 향기로운지, 마치 봄이 내 앞에 찾아온 것 같아 기분은 좋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생활이 낯설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 보니 고3이다


자명종 시계 소리에서 핸드폰 소리로

교복에서 트레이닝복으로

무색 무향의 니케아 립밤에서 톡톡 튀는 컬러 립밤으로

엄마가 사다 놓은 바디샴푸 냄새에서 내가 고른 향기 좋은 바디샴푸로

모든 것들의 색깔과 모양과 향기가 조금 바뀌었을 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열등감, 현실 부정, 소심함은 그대로인 듯하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짝사랑'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짝사랑했던 사회 선생님이 계셨다

그전에는 짝사랑을 한 번도 안 해봤을까? 당연히 아니다

늘 습관적으로 짝사랑을 해 왔었다.

네모 반듯하게 공장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교실에서 학생이 유일하게 지켜나가야 할 의무는 '짝사랑'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바쁘고 힘겹고 지루하고 두려운 고3 생활을 일탈하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짝사랑이신 '사회 선생님'의 덕분이었다

"연주야, 힘내", "연주야, 고3은 누구나 힘들어", "연주야, 1년만 참으면 10년이 행복하단다" 밑줄 쫘악, 형광펜 반짝, 별표 다섯 개를 그려도 모자랄 선생님의 응원으로 웃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짝사랑'이 필요하다

온갖 지식들을 집어넣느라 터질 것 같은 나의 뇌에게 미안하고, 고장 난 듯 쿵쾅거리는 나의 심장에게 미안하고, 석 달째 낯선 커피를 마시느라 고생하는 나의 위에게 미안하다


이제 나의 짝사랑에게 용기 낼 진짜 이유가 생겼다

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의 몸과 마음을 위해서 나는 커피가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리되지 않았지만 손끝에서 퍼지는 향수의 힘에 기대 본다


'커. 피. 마. 을' 가게 앞 간판을 또박또박 읽어본다

심장박동수는 미친 듯이 올라가고, 긴장 탓에 손가락이 차가워진다

그래도 오늘은 꼭 한다

무엇을 한단 말인가? 모르겠다.

머가 되었든지 내 마음을 비우고 가게 문을 나오겠다 다짐을 하는데,

"아직 가게 오픈 전인데요"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에 발가락까지 차가워졌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서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다시 말을 한다

"그래도... 밖에 추울 테니... 어... 기계가 데워지는데 시간이 좀 걸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네."

겨우 한마디 했을 뿐인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 것인지 기계는 데워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재즈음악도 없고 요란한 커피 기계 소리만 가득한 이 공간 속에서, 5분 남짓 그와 내가 단 둘이 있다

그가 흘긋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그를 보는 순간 정리한 말들을 까먹을까 봐 애꿎은 치즈케이크만 열심히 관찰 중이다


드디어, 무엇을 주문했는지도 까먹은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받는 순간 손이 다시 따뜻해졌다

그리고 내 머리도 기운을 차렸다

"오늘, 몇 시에 끝나세요?"

젠장,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하는 대사는 아닌 듯싶다

"아.. 가게요?"

질문이 이상하니 돌아오는 답도 이상하다

내가 찍고자 하는 영화가 '덤 앤 더머'가 아닌데 말이다

나로 인해 그가 바보가 되는 건 싫다. 그를 구해야 할 것 같다

"아니요.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차 한잔 하고 싶어서요."

우리는 청춘 영화를 찍으며 몇 마디를 더 나누었고, 인사를 건네며 헤어졌다


아! 드디어 해냈다

나의 핸드폰에, 그의 핸드폰에 서로의 번호가 저장돼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가게문을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와 오늘 저녁 6시에 만난다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10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기엔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 같아 다시 집으로 향한다.

엄마가 왜 집에 왔냐고 물어보면 생리가 터져서 집에서 공부할 거라고 말할 거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들썩거리는 내 모습이 '공부하다 미친 여자'로 보일까 봐 걱정되기에 말이다

여기는 루머가 팩트가 되는 고시원 도서관 아니던가?


동기들이여, 웃음이 많은 3년 차 고시생은 먼저 퇴근합니다. 다들 내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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