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단편소설

by 류완


건널목에 서서 초록색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은 길 건너편의 신호등이 아닌 발 끝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내 옆을 스치는 누군가의 발걸음을 의식하고 자연스럽게 인기척을 따라 몇 발짝 차도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바라본 길 위에는 여전히 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건너편의 사람들은 나의 위험을 염려하는 시선과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4차선 도로 중간까지 걸었던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오기도 부끄러워 지나가는 차량을 살피고 황급히 건너편으로 뛰어들었다.


부끄러움은 온몸으로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나는 누군가 나를 앞으로 나가게 했던 이 위험한 사건의 원인을 찾고 싶어 부지런이 주위를 살폈다. 도무지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시선이 많았으니 누군가 한 명을 붙잡고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지질한 모습은 자신의 실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 뿐이다. 도리어 두 귀에 꼽혀 있는 이어폰과 시끄럽게 새어 나오는 하드 한 메탈 사운드는 내가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차가 비켜 갔을지, 나에게 행운이 따랐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의 하루를 위험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나 자신, 나의 무관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가던 길로 빠르게 걸었다. 신나는 사운드에 걸음을 맞춰 걷다 보니 부끄러움은 금세 잊어지고 경쾌한 걸음이 이어졌다.




10년 후,


아빠는 두 돌이 채 안된 아들과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려고 손을 놓았다. 유모차 안에 던져 넣은 짐을 정리하고 아이를 태우려는 순간 엄마의 깜짝 놀라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어머! 어떡해!"


손을 놓자마자 아들은 쏜살같이 차도로 내달렸다. 두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그렇게 빨리 달려 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빠가 몸을 돌려 아들을 본 순간 이미 아이는 4차선 도로의 중간 어디쯤까지 달려 나갔다. 아빠는 힘껏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다행히 아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차도 중간에서 아빠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아빠는 황급히 돌아와 아들을 유모차에 태웠다.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빠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 아들. 이제 괜찮아."


아빠는 아들을 향해 차도로 뛰어드는 순간 좌우를 살피지 않았다. 그저 아들의 뒷 모습만 보고 있는 힘껏 내 달렸다. 누군가는 아들을 향한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빠의 마음속 계산은 달랐다. 혹시나 돌아봤을 때 달려오는 차에 스스로 머뭇거릴지 모를까 봐 두리번거릴 수 없었다. 아들의 위험 앞에서 멈출 수 있음을 알아채고는 부족한 부정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만의 비밀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10년 후,


이혼 한 지, 3년이 지났다. 나름 성실하게 양육비도 보내주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마저 보내주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사업에 실패한지는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래도 근근이 이런저런 일용직을 구해 양육비에 빚을 갚아 가며 살고 있었다.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모습에 한낮에도 두 눈은 감겨 떠지지가 않는다. 점심을 마치고 작업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고개를 떨구고 발끝을 바라보니 사람과 차들이 다니는 공간을 나눈 희미한 경계선이 눈에 띄었다. 오른발을 들어 선을 넘어 앞으로 나갔다. 한 번 머뭇 거리다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아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대로 삶의 마지막 길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참을 걸었는데 누군가 다리를 강하게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허벅지 위로 통증이 타고 올라온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돌아보지만 주위에는 멀리 떨어져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뿐이었다. 왼쪽 다리가 차량 진입 방지 장치에 걸렸다. 빨간불에 두 눈을 감고 길을 건넜으면 무언가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기대와는 달리 무사히 길의 반대편으로 넘어와 버렸다. 아뿔싸 이런데 행운을 써버리다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온다. 등 뒤에 경찰차 한 대가 다가와 섰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포기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은 아직도 그렇게 굴러간다.


경찰이 다가와 무단 횡단의 경위를 묻는다. 모르겠다고 했다. 보질 못했다고 말할 뿐이다. 사실이다. 눈을 감고 걸었으니 신호를 본 적이 없다. 왜일까? 경찰은 말도 안 되는 횡설수설을 믿는 듯하다. 아니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건지도 모르겠다. 딱지는 떼지 않았다. 조심하라는 충고와 함께 사라졌다. 경찰의 훈계를 듣는 동안 초록불이 켜졌다. 결국 먼저 건너왔지만 기다린 이들이 앞서 자신의 길을 걸었다.


이미 20년은 늦춰진 것 같은 인생인데 딱히 빨리 갈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시간보다 느리게 사는 삶이 더 나을 듯싶다. 초록불이나 빨간불이나 매한가지, 모두 같은 삶이 아니겠는가! 다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한 참을 늦게 건넌다 하더라도 다음 목적지에는 내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위로해 보았다. 뭐 아무도 없으면 어떠랴. 괜찮다. 오늘처럼 차량 진입 방지 장치를 끌어안고 잠시 위로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이 모든 사건은 빨간 불이 켜져 있는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멈춰 서야 할 때 멈추지 않으면 때론 큰 비극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비극이 극적으로 빗겨 날 때가 있습니다.

행운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행운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합니다.

비극의 순간에도 우리는 소소한 행운을 만납니다.

다시 일어나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은 그 작은 순간을 알아챌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글의 주인공은 동일인을 표현했지만 주어는 모두 다릅니다.

첫 글은 나, 10년 후는 아빠, 그리고 10년이 더 지난 후에는 주어도, 이름도 없습니다.

주인공을 표현하는 주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 삶의 역사가 그러한 듯합니다.

나만이 소중했던 젊은 시절을 지나, 누군가의 아빠였다가, 지금은 그저 이름 없는 누군가가 됐습니다.

소설이지만 약간의 경험이 가미된 글입니다.

약간입니다. 아주 약간..... (이혼하고 파산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


신호등의 빨간 불을 바라보면서 언제 켜질지 모를

내 인생의 초록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잔잔한 고백을 나누어 봅니다.

아직은 잠시 멈춰 있어야겠지요?

주위를 둘러보며 함께 나란히 선 친구들과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위로하고 싶어 글을 나눕니다.

언젠가 켜질 초록불을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기다려 줄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그럼 오늘도 안전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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