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무모한 도전

by 류완


친구 같은 후배와 함께 남해 둘레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청춘은 저 너머로 보내버린 아저씨들이 무슨 용기가 생겨 그런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남해를 향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최근의 여행이라고는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 고궁을 돌아본 것이 다였기에 서너 시간을 버스로 이동하는 것 마저 귀찮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우등’이라는 이름처럼 버스는 기대 이상으로 쾌적했으며, 버스가 주는 안락함 때문에 이후에 닥칠 고통의 시간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지인의 집에서 하루를 머물며 넉넉한 휴식을 보냈습니다. 고생 좀 해 보자고 떠난 여행이 휴양이 되었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큼 이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트레킹은 시작도 안 했지만 이미 우리는 인생의 참맛을 느낀 듯, 꽤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트레킹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시작이 좋을수록 위기는 크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다랭이 마을에서 시작한 트레킹은 첫걸음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둘레길이라고 알려진 길은 무성히 자란 풀숲에 흔적을 찾기 어려웠고, 아침부터 촉촉이 내리는 이슬비가 미숙한 도보 여행자들의 걸음걸음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흠뻑 젖은 신발은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고, 오르내리는 길은 힘들다 못해 조금씩 짜증으로 물들어갔습니다. 출발 전, 남해 트래킹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찾아봤을 때는 이런 길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초여름,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바닷길을 걸으면 그저 시원할 줄만 알았던 철없는 어른들은 이렇게 스스로 고난의 행군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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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지나니 비는 그쳤습니다. 비가 그치니 구름 사이로 태양이 내리쬐기 시작했습니다. 비로 젖은 몸은 마르기 무섭게 땀으로 다시 젖었습니다. 이래저래 젖기 마찬가지라면 비가 더 나았을까요? 그런 고민은 조금씩 쌓여가는 피로 속에서 시나브로 사라져 갔습니다.






첫 코스가 험난해서 그런지 갈수록 길은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산길을 빠져나오니 제법 잘 깔린 편안한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언덕이 있을 뿐 힘겹게 오르는 길은 없었습니다. 발걸음에 여유가 생기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처음 보는 멋진 풍경에 감탄도 하고, 잠시 걸음을 멈춰 사진 한 장을 남기며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남해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땅끝 해안에서 보는 바다의 절경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한 번은 높은 곳에서, 한 번은 바닷가를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 잠시 쉬었다가, 낚시를 즐기는 동네 어르신들 옆에서 구경도 했습니다. 국도를 따라 걸을 때는 가끔 지나는 남해 버스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버스는 우리를 피해 살짝 떨어져 지나갔습니다. 버스 운전기사분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한 편으론 그 긴 시간 동안 한 두 대 지나는 버스를 만나다 보니 반가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살짝 손을 들어 감사와 반가움의 표시도 하고 싶었지만, 도시인의 소심한 마음은 행동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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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양한 길을 걸었습니다. 산등성이 오솔길을 걷다가, 길도 없는 숲을 헤치고 나왔더니 비에 젖은 흙길을 만났습니다. 자갈이 깔린 길을 걸을 때는 발목에 무리가 왔는지 무릎 아래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걷게 되면서 걸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아스팔트가 깔린 국도를 따라 걸을 때는 종종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들을 의식하느라 걸음에 여유를 줄 수 없었습니다. 사람보다 차가 더 많이 다니는 길인 데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찐득한 느낌을 더해 걸음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잘 깔린 길이라도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길은 생각처럼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시멘트로 포장된 해안가 마을의 둑길은 한결 편안하게 걸었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길은 아니지만, 지면을 스치는 발걸음에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살며시 미끄러지듯 걷는 느낌이 좋았고 걸음을 방해하는 다른 운송 수단을 만나지 않아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뚝을 때리고 돌아가는 경쾌한 파도 소리와 드문드문 심긴 소나무에서 풍기는 향기가 청량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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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지쳐갔지만 걸음은 느려지지 않았습니다. 힘든 경로를 지나고 나니 지금 느껴지는 피로감은 감당할 만했습니다. 무작정, 준비도 안 된 트레킹이었습니다. 후회도 짜증도 났지만, 다행히 해가 지기 전까지 걷자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한 번 우리가 왜 걷고 있는 건지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 가자고 했는지 묻자 서로에게 탓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서로의 농담에 웃으며 여유를 찾았습니다.


다시 한번 이렇게 무모한 걸음을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젊다고 위로하면서도 하루하루 포기하는 일들이 늘어가는 나이다 보니 다시는 무작정 걷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잊어지지 않는 남해의 풍경은 가끔씩 새로운 무모함을 꿈꾸게 합니다. 무모함은 도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처음에는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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