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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May 08. 2022

사랑은 확률을 따라갑니다



잠들기 위해 먹어야 하는 약이 9개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약을 삼키다 목에 걸려 모두 뱉어 내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길게 이어지는 구역질의 끝에는 처방을 내린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햐~ 내가 이 고생하려고 병원을 다녔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예정된 진료 날짜가 되어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살아 있다 보니 그날의 힘든 마음은 잦아들었고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처방한 약에 대해 물었습니다. 조금 많다는 투정이 담긴 고백입니다.

선생님은 제 이야기를 귀담아들으시고는 약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진료가 길어지면서 불면증의 다양한 증상에 대한 기록이 쌓였습니다.

잠이 빨리 들지 않는 것, 램 수면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과 잠이 깨고도

불쾌한 시간이 이어지는 과정을 모두 숙지하고 계셨습니다.

잠들기 전에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처방은 약에 대한 내 몸의 반응을 살피고 이것을 넣기도, 저것을 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내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님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셨고

내가 잊어버린 부분까지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처방을 내려 주셨습니다. 


처방은 확률입니다.

새로운 전염병이 생기면 많은 사람들이 백신과 치료제를 애타게 기다리는 동안,

전염병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쌓여가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가장 확률이 높은 예방과 치료 방법을 찾아갑니다.


감기에 걸려도 목감기, 코감기, 몸살감기에 따라 처방이 다르고 

수많은 약들 중에서 유독 나에게 잘 맞는 약이 따로 있기도 합니다.

그런 약을 찾게 되면 잃어버린 동생을 만난 것 마냥 반가운 마음으로 한 박스씩 사두기도 하지요.

내 방 한편에 쌓여있는 약상자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를 든든한 마음이 생깁니다.

자주 아프다 보니 이상한 쪽에서 위로를 찾곤 하네요.





병원을 처음 다닐 때는 받아 온 약봉지를 보면서 한 숨을 깊이 쉬곤 했었는데

지금은 감사의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병원에 돈 벌어다 주는 건데 뭔 감사냐 하시겠지만

이 모든 처방약 속에는 나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는 아내의 모든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노력할 뿐, 여전히 부족함이 넘쳐흐르는 남편입니다.

아내에 대한 데이터가 적었던 시절에는 마음대로 처방했다가 화를 더 키운 날도 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데이터를 조금씩 쌓아가면서 서로가 싫어하는 모습을 피하고

마음이 맞는 부분을 맞춰가면서 제법 그럴싸한 부부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숨길 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치의에게 고백하듯 섭섭했던 마음, 부끄러운 모습,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행동을

진솔하게 풀어내다 보니 지금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간혹, 친구나 후배들이 부부관계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으면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숨김없이 솔직하라고.......


누군가는 적당히 감추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도 하지만

결국 돌아 돌아 알게 되고 문제는 조금 더 늦게 터질 뿐이었습니다.

서로의 감정이나 단점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그냥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억지로 감추려 하지 않고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에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

먼저 들어주고 이해하다보면 별일없이 지나가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의 데이터가 쌓여 있기에 낯선 모습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반갑습니다.

공감할 수 있고, 기다려 줄 수 있고, 응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랑도 항상 같은 모습일 순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 시간과 대화의 양에 따라 조금씩 달라집니다.

서로의 진심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은 성장합니다.

약을 처방받고 조금씩 치유되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사랑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저의 불편함을 들어주시고 처방을 조금 바꾸어 주셨습니다.

9개의 약을 6개와 3개로 나누어 많은 건 잠들기 한 시간 전에,

다른 하나는 눕기 전에 바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감사한데, 더 귀찮아졌습니다.

보기보다 고집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냥 한 번에 다 먹어야겠습니다.

아무튼 약 먹는 걸 고민하다 보니 다른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효과는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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