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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Feb 19. 2022

2월



찬 바람이 손 끝에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추위 취약자입니다.

채질이 그러하니 겨울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여름에 태어나 더위는 한 없이 즐거웠지만 겨울이 되면 

내일은 얼마나 추울지를 고민하느라 긴긴 겨울을 힘겹게 보내곤 했습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조금씩 여유가 생깁니다.

노란 개나리와 화려한 벚꽃의 조화가 아름다운 계절을 그려내면 이제 겨울의 몹쓸 추위는 한 동안 만나지 않을 거라는 설레는 마음이 코끝으로 타고 들어와 온 몸에 엔돌핀이 돌게 만듭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꽃이 만개한 봄 보다 늦겨울의 정취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겨울의 찬 바람이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겨울이 끝나간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지는 시간입니다.





'2월'


얼마 전,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 언제인지 물었을 때,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던 말이었습니다.

태어난 여름도, 따뜻한 봄도, 시원한 가을도 아닌 겨울의 끝,

2월을 가장 좋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에는 여름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태어난 날이 있었고, 여름 방학이 있었고, 더위는 수영장을 가거나 찬물로 샤워를 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친구들과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살은 벌겋게 그을리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운동장 수도꼭지에 머리를 헹구고 나면 더위는 씻은 듯이 날아갔습니다. 여름 방학이면 시골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할머니 집이 바닷가여서 언제나 바캉스 가는 기분으로 향했습니다. 교회의 여름 수련회까지 다녀오면 여름 방학의 절반은 집 밖에서 보냈 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봄과 가을이 좋아졌습니다.

야외 활동하기에 좋은 계절이 오면 멋지게 차려 입고 친구들과 서울 시내 곳곳을 누볐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루 종일 걸어도 덥지도 춥지도 않았던 계절은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기에도 좋았지만 사랑을 나누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걷는 계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했습니다. 길 위에 뿌려 놓은 사랑의 추억은 대부분 봄과 가을의 기억입니다.


아이들을 낳고 나니 봄과 가을은 괴로운 계절이 되었습니다.

환절기 감기를 계절마다 겪으면서 아이들의 상태를 예민하게 살펴야 했습니다. 아침과 오후의 기온 차이는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 감기 바이러스를 선물합니다. 열이 오르고 기침과 가래를 뱉어내는 아이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젊은 부부는 부모의 모습을 배워갑니다. 막내가 스스로 약을 먹고 부모의 손을 타지 않을 때까지 15년은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자랐고 숨기는 것이 늘었으며 성인이 된 아들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함께 모여 있어도 이전처럼 시끌벅적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계절에 상관없이 신경이 쓰이지만 좀처럼 레이더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집은 좁아터져 가는데 스텔스 기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바퀴벌레를 사육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밥을 차려놓으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냉큼 먹고는 쏜살같이 사라집니다. 집에서 잠만 자는 하숙생 큰 아들은 며칠 만에 만나는지 서로 어색해 같이 목인사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부부는 아이들의 무관심 덕분에 자주 둘 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날이 좋으면 매일 한 시간씩 산책을 즐깁니다. 매일 도는 동네지만 언제나 새롭습니다. 이야기가 다르고 매 번 다른 골목과 공원을 찾아 걸으니 지루하지 않습니다. 부부의 손에는 주름이 늘었고 다리의 근육은 줄어가지만 포근한 계절, 함께 걷는 마음은 언제나 풍성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발걸음마다 불안과 걱정을 떨구고 이해와 위로의 마음으로 손을 잡고 걷습니다. 함께 걸을 때 우리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무한 사랑 동력으로 한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걸음을 즐겁게 만듭니다.

골목을 돌아 울창한 숲길이 조성된 공원을 만날 때까지 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처음엔 공원 내의 숲길을 걸을 때가 행복했지만 지금은 공원 입구로 향하는 순간이 더 행복합니다. 행복한 기다림은 마음을 들뜨게 하고 함께 있기에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기다림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활짝 핀 벚꽃을 바라보는 것보다 몽글몽글 올라온 꽃 봉오리를 보는 순간이 더 즐겁습니다. 꽃망울 속에 숨겨진 화려한 색과 향기가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입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반복하다 보니 계절의 변화가 예측되면서 자연의 변화가 상상으로도 채워집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을 향한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계절의 사이를 건너는 지금 나는 새로운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0번은 훌쩍 넘게 경험한 봄이지만 어느 해보다 설레는 마음이 크게 느껴집니다. 달리 큰 계획이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살림살이에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꿈꾸는 미래도 없습니다. 긍정적인 마음보다 불안을 자극하는 일들이 여전히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드라마틱한 변화나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단지 삶에 대한 시선 하나만 바꾸어 보기로 했습니다. 내일이 없다 하더라도 언제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어느 철학자의 고백이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설령 봄이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마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억지로 불안한 자신을 변명할 필요도 없고, 약을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잠이 안 오면 새벽을 즐기며 살기로 다짐하니, 나 자신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부끄럽고, 나약한, 한 없이 밀어내기만 했던 자신을 조금씩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2월은 그렇게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시금 열정적으로 여름을 만끽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2월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시간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네요. 괜찮습니다. 이제 나는 어느 계절이든지 2월을 보내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직은 집을 나서면 차가운 공기가 귓불을 시리게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추위라 생각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기다림의 설렘은 환하게 핀 꽃길 속에 녹아버리겠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년에는 어느 계절이 나에게 가장 기쁨을 줄지, 아니면 지금과 다름없는 마음일까요?


예년보다 추운 2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더 좋습니다.

기다림이 행복한 사람, 나는 2월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vZXoel5vgg&ab_channel=Michael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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