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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Mar 22. 2022

아내가 무서울 때


1.

"어머 화초가 벌써 이렇게 죽어가네. 다시 살려내야지."

책상 위에 놓은 작은 화병을 들고 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났어?"

"아니 그냥, 살리는 게 재밌어서."

"맨날 죽는 걸 왜 여기 갖다 놔?"

"그래야. 당신이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 알 수 있잖아."


2.

"우리 결혼 초에 부부싸움 크게 한 적이 있었잖아. 내가 화나서 방에 들어가서 문 잠그고 안 나온 날. 기억나?"

"뭐 대충, 뭘 또 그걸 기억해내고 그래. 애들도 없던 시절인데."

"그날 자기가 내 방 문 열고 들어오려고 뭘로 막 쑤시고 그런 거 기억해?"

"답답해서 뭐라도 해서 열어보려고 했지?"

"그때 뭘로 그렇게 문 틈을 쑤신 거야?"

"음, 글쎄? 아마.... 식칼?"


3.

"여보 있잖아. 큰 애 군대 가기 전에 가족 여행 한 번 다녀오면 어떨까?"

"좋긴 한데 돈은 있어?"

"비상금으로 따로 모은 돈이 50만 원 정도 있어."

"그걸로는 좀 부족하지 않겠어?"

"그때까지 더 모아 보지 뭐. 부족하면 자기가 좀 보태고."

"내가 돈이 어딨어?"

"뭘 또 없다 그래. 다 아는데."


4.

몸살감기가 심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안쓰러운지 아내가 옆에 앉아 머리에 손을 올려 봅니다.

"열은 심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프면 아무 말이나 마구 터져 나옵니다.

"여보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혹시 나 죽으면 화장해서 집 앞 하천에 뿌려줘.

무덤 같은 건 만들지 말고 알았지?"

"알아봤는데 그런 거 아무 데나 뿌리면 안 된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낫기나 해?"

"당신이 그걸 왜 알아봐?"


5.

"맨날 지는 야구는 뭐하러 매일 봐요?"

"아니야. 그래도 우리 팀이 상위권이라고."

"그래? 난 볼 때마다 선수들한테 뭐라 하길래 맨날 지는 줄 알았지."

"야구는 원래 그런 맛으로 보는 거야. 매 순간 욕도 하고 환호하면서 보는 거라고."

"그럼 좋아하면 욕해도 괜찮은 거지?"


6.

산책 나가자는 아내의 요청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내 모습을 보고 껄껄대고 웃습니다.

"여보, 자기 트레이닝복 거꾸로 입었잖아. 하하하~"

"바지가 앞 뒤 구분이 어려우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크게 웃어."

황급히 옷을 고쳐 입고 아내를 따라나서는데 아내의 웃음기 담긴 한 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이고~ 아무래도 버려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저기 재활용 봉지 좀 들고 나와요."

"뭐? 나 말하는 거야 재활용이야? 여보?"






둘째가 여섯 살 때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에 걸려 일주일 정도 입원했습니다.

엄마를 찾는 막내 때문에 입원 셋째 날에는 아빠가 둘째를 돌보기로 했습니다.

잘 자던 아이가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서 토하고 난리도 아닙니다.

시트도 갈고 옷도 갈아입히고 나니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습니다.

날 밤을 새운 것 같은데 아침을 먹고 난 아들은 또다시 속을 게워내고 말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아내에게 빨리 와 달라는 전화를 마치자마자 주사를 놓던 담당 간호사님이 응원을 남깁니다.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이네요. 내일쯤에는 밥도 잘 먹을 수 있을 거야."


점심시간쯤에 아내가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내가 좀 늦었지? 청소하고 밀린 빨래도 해 놓고 오느라. 찬우는 좀 괜찮아?"

"간호사님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시네."

"그래? 다행이다. 자기는 이제 집에 가서 좀 쉬어. 난 오래간만에 푹 잤더니 충전이 다 된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잔뜩 먹구름이 끼었지만 마음은 홀가분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빨래며 설거지며 청소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병원에서 쉬다 온건 아니었을까?


정확히 2년 뒤 아내는 아들이 입원했던 병원에서 갑상선을 모두 떼어냈습니다.

1주일이 지나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언제나 그랬듯이 집안일을 시작했습니다.

괜찮냐고 묻는 남편에게 아내는 싱거운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어차피 죽을병도 아니라는데 뭘. 착한 암 이래잖아."


덕분에 가족은 아내가 암환자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늘 그래 왔던 대로 엄마를 귀찮게 하고 집안일을 쌓아 둡니다.

아내는 이른 아침마다 약으로 호르몬을 대체하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날 이후, 아내의 일상은 변했지만 가족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조차 아내의 병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아주 가끔 퇴근 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면 

그제야 아내가 힘든 일상을 살아내고 있음을 재확인하곤 합니다.

고맙고 미안하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을 투정하지 않는 

아내를 보고 있으면 섬뜩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여전히 가끔, 아내가 무섭습니다.

한 번도 나에게 큰소리친 적이 없는데도 아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콕콕 박힙니다.

아내를 향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아내를 무서워하는 날이 생길 것 같습니다.

두려움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최선을 다 해 살아야겠습니다.

혹시나 분리수거되지 않으려면요.



보조개마저 무서운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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