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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Nov 14. 2022

놓아두면 좋겠습니다





붉게 물드는 시간보다

땅 위에 머무는 시간이 짧습니다


어차피 인생도 그러하잖아요


황혼이 내리면

시간은 

흩어진 마음을 재촉합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그대로 놓아두면 좋겠습니다


어린아이 발길질에

흩날리는 노오란 낙엽은

가을이 주는 행복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함께 걷는 연인의 걸음은

사랑이 자라는 공간


어차피 썩어 땅속으로

사라져야 한다면

이 계절, 누군가의 마음으로

조금 더 함께 머물고 싶습니다






고등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하굣길, 대로변의 보행로는 넓고 쾌적했습니다.

인적이 드물어 친구들과 걷는 동안 우리의 수다를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길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보행로 양쪽으로 아름드리 자라던 플라타너스 때문입니다.

나무가 크기도 컸거니와 여름이면 무성한 나뭇잎이 만드는

거리의 그늘은 제법 시원한 걸음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이 길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가을입니다.

하나 둘,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넓은 보행로를 온통 붉게 만들어 버립니다.

게다가 가을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하늘도 길도 모두 붉게 칠해 놓은 시간을 걷습니다.


서너 명의 친구들과 함께 걷는 가을 하굣길은 자연이 만들어 준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제법 넓은 통행로가 낙엽으로 발목까지 쌓인 것 같습니다.

신나게 그 위를 미끄러지다가 낙엽을 한가득 주어 친구에게 던지기도 했습니다.

낙엽을 차면서 걷던 친구가 재밌는 이야기를 합니다.


"조금만 더 쌓이면 굴러가도 재밌겠는 걸?"


모두 웃어넘겼지만 한 편으로는 기대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침대 위를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거리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회색 빛 보행로는 깔끔하게 그 모습을 보여주었고 우리는 터벅터벅

각자의 발소리를 들으며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걸었습니다.


누군가의 성실함이 청춘의 쓸데없는 상상력까지 쓸어가 버렸습니다.

길게만 느꼈던 고등학교 시절도 수험생으로 보낸 1년을 빼면 고작 2년,

친구들과 울고 웃었던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래서 가을은 게으름이 좋습니다.

두둑이 쌓인 낙엽을 보면 그리 반가울 수 없습니다.

이젠 상상으로만 그 위를 뒹굴 수 있음에도 흐뭇한 미소는 그때 그 시절을 닮아 있습니다.


잠시만 놓아두면 좋겠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한 해의 짧은 기억도 잠시 머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보다 위로가 필요한 계절이네요.

바람에 구르는 낙엽에 수줍은 고백, 담아 보냅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우리 다시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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