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내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버스에서 곧 내린다는 문자,
알아서 마중 나오라는 신호입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아내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집 나간 지 열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아내는 더욱 반가워합니다.
그리고 남기는 뜬금없는 말,
"우리 동네에 오니 참 편안하네."
낯설고 복잡한 거리를 다녀온 마음이 그러한가 봅니다.
공황장애를 겪으면 바깥 활동이 어려워집니다.
언제 어디서 숨쉬기 어려운 순간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자 정신과 선생님은 필요시 먹을 수 있는 약을 지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항상 지니고 다니다가 증상이 나타날 것 같을 때 먹으면 되는 약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지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요."
정말 그랬습니다.
가방 한 편에 고이 간직한 약봉지 하나는 집에서 멀리 떠날수록
의지하게 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불안을 약으로 해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외부 활동에 적응하게 되면서 약에 의존하는 횟수를 빠르게 줄여 나갔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약을 지니지 않아도 편안하게 먼 거리를 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약 때문인지, 내 의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약도 불안을 이기려는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집 근처 동네를 걷습니다.
오래된 거리, 언제나 같은 표정의 건물들이지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참 좋습니다.
조금 더 걷다 보면 아름드리 가로수 길이 반갑게 맞이합니다.
계절마다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지만 그마저도 동네 친구 헤어스타일 바꾼 것 마냥 반갑습니다.
오늘은 제법 울창한 나뭇잎 덕분에 시원한 그늘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없기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들은 대부분 내 소유가 아닙니다.
따스한 해살, 시원한 바람, 아늑한 카페와 오래된 식당에서 퍼지는 맛있는 냄새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때론 놀랍습니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참 편리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다양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편리한 위안거리들은 나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워낙에 아날로그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스스로 신발을 신고 나와 익숙한 거리를 걸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날려버립니다.
쉬고 싶어 침대 위에 편안하게 누워 있으면 도리어 가슴을 조이는 불안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편안함은 적당한 긴장 상태로 내가 만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참 불편한 사람입니다.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큰, 여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내 안에 주어진 감정의 병은 당연한 결과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불안은 진짜 편안함에 이르는 길을 천천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감정으로 고통받고 계신다면
한 번쯤은 시도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편안한 신발을 신고 매일 만나는 익숙한 길을 천천히 걸어보세요.
그리고 언제나 똑같아 보였던 그 길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감정을 찾아보세요.
건물은 어제와 달라졌고, 지나는 사람들도 어제와 다른 사람입니다.
가로수 나무의 키가 자랐다면 어제보다 짧아진 그림자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익숙함 속에서 느끼는 아주 작은 변화를 찾아낼 수 있다면
편안함에 이르는 가능성도 알아챌 수도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기에 나 역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쪼록 긍정적인 변화이기를 바라는 마음의 편지입니다.